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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마스크 한 장의 책임 / 정세라

등록 2007-12-13 18:56수정 2007-12-13 21:57

정세라/사회정책팀 기자
정세라/사회정책팀 기자
한겨레프리즘

검은 눈물을 흘린다. 바다도, 개펄도, 뿔논병아리도 …. 눈자위까지 검게 물든 청둥오리는 개펄에 뒹군다. 이들은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날지 못하는 새는 얼어 죽는다.

해마다 서해안을 찾던 평화로운 철새 손님들이 예고 없이 재앙을 맞았다. 반짝이던 녹색 정수리와 은회색 날개는 이제 오간 데 없다. 끈적이는 부리를 열어 보지만, 원망하는 울음마저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서해 바다에 재앙을 뿌린 것도 인간이지만, 이들의 눈물을 닦아내는 것도 인간이다. 최근 태안에는 하루에도 만명이 넘는 자원 봉사자가 다녀간다. 13일 자원 봉사자는 1만3천여명으로 늘었고, 이번 주말에는 여기에 수천명이 더해질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물론 지자체 자원봉사센터마다 봉사자를 실어 나를 차량을 대절해 두고 있다.

환경운동연합도 15일 기름 제거에 참여할 2천명의 자원봉사 모집을 일찌감치 마쳤다. 수능을 마친 이다솜(18·부천북고3)양은 이날 태안행 버스를 탄다. 이양은 “가족들과 해수욕을 다니던 서해안이 끔찍하게 변해 가슴이 아팠다”며 “몸도 건강하고 시간 여유도 있어서 하루쯤 봉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중요한 것은 현재로서는 사람 손으로 오염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친환경적이기 때문이다. 검게 물든 해안을 되돌리는 데 별 뾰족한 수는 없다. 방제 인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돌려 기름을 걷어내는 속도를 높여야 한다. 환경단체 활동 경험이 있는 박명규(44)씨는 “기름을 바닷물에 섞어버리는 유처리제를 살포하는 걸 보고 분통이 터졌다”며 “내 손으로 기름 한 방울이라도 더 걷어내야겠다는 생각에 태안으로 간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들은 팔을 걷었지만, 이들에 대한 지휘와 지원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봉사자들이 겨울 바닷가에서 기름덩어리와 씨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악취에 머리가 아프고 토악질도 나온다. 벤젠, 톨루엔, 벤조피렌 등 각종 발암 물질은 공기 속을 떠돌고, 눈과 피부도 따갑다. 이들은 이런 피해를 감수하는 것은 물론, 차비조로 1만∼2만원의 참가비를 내면서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기름 흡착재 같은 물품은 물론 유해 물질을 막는 필터 마스크, 고무장화 등 기본적인 보호 장비 조달마저 엉성한 모양이다. 식사 지원도 제대로 안 돼, 사비로 밥을 사 먹거나 챙겨온 초콜릿·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태안군 자원봉사센터의 한 직원은 “일단 고무장화, 마스크, 간식 등을 개인적으로 준비하라고 안내하고 있다”며 “농어촌에서나 쓰는 고무장화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이들이 많다”고 털어놨다.

태안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나섰다. 이들의 열의와 손길을 빌려 재앙을 최소화하는 것은 정부와 시스템의 몫이다. 이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 또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2002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기름 유출 사고 때 방제 인력의 호흡기 질환 유병률이 일반인보다 73% 높았다고 한다. 장기적으로는 발암 가능성을 높인다는 우려마저 뒤숭숭하게 들려온다.

정부는 대기에 퍼진 유해 성분에 대한 측정 결과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많은 봉사자들은 그럼에도 감기용 마스크나 허술한 비옷 한 장에 안전을 내맡기고 구슬땀을 흘린다.

검은 기름이 개펄과 모래밭 깊숙이 시시각각 스며든다. 철새의 울음 소리를 들은 이들은 사심 없이 태안으로 달려왔다. 정부가 여기에만 기대는 것은 무책임하다. ‘필터 마스크’ 한 장의 책임이 아쉽다.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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