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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천박한 문화와 문화의 척박함 / 윤태진

등록 2007-12-24 18:51

윤태진/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윤태진/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야!한국사회
선거결과는 물론 선거판 자체를 마뜩잖아 하던 학생 하나가 툴툴거렸다. 개표방송 때문에 ‘무릎팍도사’가 결방되더니, 다음날 아침에는 당선자의 현충원 참배 중계 때문에 아침 드라마를 보지 못해 기분이 나쁘단다. 옛날 같았으면 무엄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다. 감히 나랏님이 결정되는 순간이 오락프로그램 하나보다 덜 중요하고, 새 시대의 엄숙한 출정식이 불륜 드라마만 못하다니.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대중문화의 복수다. ‘천박한’ 대중문화가 ‘고상한’ 정치에 대해 벌이는 통렬한 복수극이다.

문화는 일상적 삶이다. 소위 문화적 마인드라는 것은 인간과 일상과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다. 그런데 그 많던 대선 후보들은 어떤 문화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을까? 과연 있기나 했던 걸까?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기로서니, 이번 대선만큼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던 선거는 드물었다. 통일을 논할 때도 문화적 이질성의 해소보다는 경제적 실익 계산이 앞서고, 노동이나 농촌 현장을 입에 올릴 때도 소득 증대 운운만 반복될 뿐 우리들이 이주노동자나 동남아 새댁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연예인들을 유세에 찬조출연을 시킬 생각은 해도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현황이나 미래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영화랑 드라마 많이 수출해서 떼돈 벌자는 자본주의적 속성만 보일 뿐.

와인과 오페라를 즐기며 텔레비전 코미디는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에게도 대중적 인기는 생명같이 소중하다. 정작 그들이야말로 가장 대중문화적이다. 좀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어도 시청률이 높으면 안도하는 수많은 방송 제작진들도 기실 정치인들에 비하면 순박한 편일지 모른다. 사실 우리나라 정치는 문화를 일관되게 전략적 도구로 활용해 왔다. 필요에 따라 민족문화와 전통문화를, 혹은 민중문화를 들먹였고, 문화콘텐츠나 문화기술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만들어냈다. 지자체마다 공연장을 지었고, 신문사마다 명화 전시회를 개최했다. 짐짓 저급문화로 간주하던 대중문화에도 나름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용가리와 한류를 칭송했고, 비의 월드투어를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문화라는 글자의 과잉과 문화의 옷을 입은 자본논리의 범람이었다. 사학과가 역사문화학과로 문패를 바꿔달았고, 그림은 뇌물이나 상속의 도구가 되었으며, 대중문화 영역은 질적 향상과 무관한 시장의 왜곡을 낳았다.

경제도 좋지만, 당선자의 문화적 마인드를 보고 싶다. 경제정책에도 ‘사람과 삶’에 대한 애정은 반영되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문화관광부의 존재 이유가 문화산업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산업적 성공은 산업자원부가 고민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피티비가 그저 새로운 (통신) 산업으로 간주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피티비가 만들어내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그 도구를 이용할 수천만 시청자이고, 정통부와 방송위의 세력 다툼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 애착이기 때문이다.

사족을 하나 달자면, 언론도 정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듯하다. 열흘 전 쯤 <조선일보>는 “총기 탈취범 조영국 ‘서든어택’ 즐겨”라는 기사제목을 커다란 활자체로 실었다. 이 게임을 좋아하는 수백만 한국인들이 엉겁결에 잠재적 흉악범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라면을 즐겨 먹어”나 “노래방을 즐겨”라는 제목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대중적인 인기를 간절히 원하는 언론기업이 정작 대중적인 문화양식(게임)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시하는 현실. 이것도 문화적 마인드가 척박하고 문화적 인식이 천박한 우리 (정치) 사회의 한 단면이다.

윤태진/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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