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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이민 가지 마세요 / 반이정

등록 2007-12-31 18:15수정 2007-12-31 19:07

반이정/미술평론가
반이정/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바야흐로 무분별한 중대 결심의 남발과 이행 못할 언약의 시즌이다. 열두 장 달력 중 처음과 마지막 장은 정리와 초심이란 용어와 붙어 다니는 통에 가슴 벅찬 달로 주입되지만, 지나고 보면 성과 없는 흥청망청만 충만한 달들이었다. 하지만 차기 국가 지도자의 선출 직후 맞는 새해여서 유권자마다 느끼는 만감은 상이할 것이다. 이민 떠나고 싶다는 둥, 5년만 참자는 둥, 요즘 신문 방송 안 본다는 둥 따위의 불평도 들려온다. 정확히 5년 전 반대 진영에서 흘러나온 신음 아닌가. 아니 5년 주기로 인구의 절반쯤은 같은 증세에 시달린다. 그렇지만 이민 갈 형편도, 차기 대선까지 견딜 지구력도, 흥미진진한 뉴스를 무시할 소신도 없다면, 뭔가 다른 대안을 품고 새해를 맞는 게 낫지 싶다.

나 역시 위의 세 요건에 전부 해당하므로 푸념만 늘어놓을 처지가 아니다. 직함에서 보듯 내 직업은 미술 평론이다. 좀 쉽게 풀이하면 전시회나 출품작 개개의 완성도를 논하는 게 주 업무지만, 드물게 공동체가 짊어진 사건·사고에 관해서도 논한다. 따라서 새해 각오도 직업적 성격의 테두리 안에서 다듬어질 수밖에 없다. 새해 다짐을 위해 지난해 비평가로서의 충실도 여부를 따져볼까 한다.

2007년 미술계는 흔히 시장과 사건이 주도한 해라고 풀이한다. 옥션을 소재로 한 공중파 미니시리즈까지 등장했고, 평생 전시장 관람과는 인연이 없던 소시민까지 미술품 투자에 가세해 화단은 전에 없는 호황 속에 비명을 질렀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사건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10대 국내 뉴스 속에 미술인이 직간접적으로 둘씩(신정아 학위 조작, 홍라희 비자금 미술품 구입) 연루되어 뜻하지 않은 아트 파워를 과시했다.

시장과 사건으로 입담의 호재를 누린 만큼, 내 역할도 이에 합당했는지 따져봤다. 별로 없었다. 관련 논평을 몇 차례 내놓았지만 비평의 몫이 한없이 축소된 오늘날, 위력이라고 하기에도 창피한 수준이다. 시장주도형으로 형질 변화를 마쳐 시장 거래의 활성화가 마치 예술 르네상스인 양 착각하는 작금의 분위기 속에 예술 비평가의 몫은 제한될 운명에 놓인다. 물론 20세기 이전의 작가와 비평가의 이상적 관계를 염두에 뒀다면 비현실적인 설정일 것이다. 그래도 자의식이 강한 비평가라면 현실적 무력감 앞에 깊은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주제넘은 비유일 테지만 간혹 내 직업을 공중파의 사회고발 프로그램과 견주길 즐긴다. 비평의 대상과 규모는 비교할 수 없지만 책무만큼은 유사해서다. 비평 대상의 불편한 패악을 들추어 공동체(시청자·독자)에 전달하고 공동체의 정당한 분노를 동력 삼아 비평 대상의 개선책에 합의를 유도한다는 점이 그렇다. 이때 전제는 비평이 그만큼 신망을 얻고, 공동체가 비평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미술시장 매매가와 제도권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미학적 성과까지 기형적으로 결정되는 오늘, 미술 비평의 수행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 상태다. 우울하게도 비평가의 처세는 때로 권위와 시장이 승인한 명품에 화려한 각주를 달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새해 들어 이와 흡사한 불행이 세상의 관제탑인 언론에도 반복될 태세여서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 일 같지 않아서다.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공영방송 민영화 방침을 내놓을 거란 풍문. 대중의 값싼 호기심에 구걸한 오락물이 공영성의 소신을 삼켜버릴 수 있다. 새해맞이 중대 결심 하나를 감히 제안하면 이렇다. 이민 떠나지도, 5년간 주저앉지도, 매체와 거리 두지도 말자. 정반대로 행동하자. 이것이 고사 직전의 비평문화를 구원하고 절망을 견제할 작은 출발선이다.

반이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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