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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미스터 10퍼센트 / 정남구

등록 2008-02-20 20:16

정남구 논설위원
정남구 논설위원
유레카
1988년 파키스탄의 군부 실력자 지아 울 하크 장군이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자, 베나지르 부토에게 기회가 왔다. 71년에 최초의 민선 총리가 됐으나 77년 군부 쿠데타로 밀려나고 사형까지 당한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부토는 그해 서른다섯의 나이로 총리에 오른다. 이슬람 국가 첫 여성 총리였다. 하지만 부토는 2년 만에 총리직에서 쫓겨났고, 93년 복귀했다가 3년 뒤 또다시 쫓겨났다. 두 번 다 부패가 문제가 됐다.

부토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의 별명은 ‘미스터 10퍼센트’였다. 부토 총리 시절 특혜 대출을 비롯한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뒷돈으로 10퍼센트를 받은 까닭이다. 시간이 흐르자 그의 별명은 미스터 20퍼센트, 미스터 30퍼센트로 바뀌어갔다. 부토가 두번째로 총리직에 올랐을 때 자르다리는 투자 총괄 장관을 맡았다.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을 쓴 레이먼드 베이커는 “그가 마침내 미스터 100퍼센트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96년부터 2004년까지 옥살이를 했다.

부토 이후 파키스탄의 권력은 99년 무혈 쿠데타로 집권한 무샤라프 대통령이 쥐고 흔들었다. 망명 중이던 부토는 무샤라프의 철권통치에 대한 국민 반발이 거세지자 지난해 귀국해 권토중래를 노렸으나 암살당했다. 하지만 지난 18일 실시한 총선에서 부토가 이끌던 파키스탄 인민당은 제1당이 됐고, 당의장인 자르다리는 실권자로서 연립정부 구성을 이끌고 있다.

부토는 2002년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권력을 원한 적이 없다. 파키스탄 국민들이 나를 원했을 뿐이다.” 부토 일가는 언제나 선거로 권력을 잡았으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미스터 10퍼센트’가 권력 핵심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다음달엔 우리도 총선을 치른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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