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이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야!한국사회
1987년 차우셰스쿠 독재정권하의 루마니아. 낙태는 불법이다. 한 여대생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친구는 그를 위해 검열을 피해 가며 호텔방을 하나 얻는다. 그러나 불법 낙태 시술자는 그가 이미 너무 위험한 상태에까지 와 있다고 온갖 모욕적이며 폭력적인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곤 자신의 위험부담률을 핑계 삼아 시술 전에 그와 그의 친구, 두 여자를 강간한다. 그에게는 정당한 값이고, 두 여자에게는 파렴치한 독재 치하 가부장제의 일상화된 폭력 중 하나다. 영화 <4개월, 3주 … 그리고 2일>은 독재정권에 차압당한 한 사회의 숨막히는 불안과 긴장, 그리고 뻔뻔한 윤리 부재의 시간을 불법 낙태 시술로 보여준다. “생리 중이에요”라고 말하는 여자와 “이게 누굴 갖고 장난질이야?”라며 협박하는 남자,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은 남자들이 가장 손쉬운 거래 대상으로 생각하는 ‘여성의 몸’이고, 그것은 곧 임신과 출산의 결정권을 박탈당한 몸이다. 영화는 여성의 육체에 낙태금지법과 강간이라는 폭력이 새겨질 때 그것이 동일한 구조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군더더기 없이 보여준다. 남자의 몸은 노동을 위해 교환되거나 장기 유출을 위해 난도질당할 수는 있다. 그러나 법을 어겼을 때 강간까지 보너스로 보태지는 일은 없다.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에서 동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조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낙태금지와 그로 인해 발생한 여성들의 비극은 여성의 인권, 즉 젠더권이 아직 사회적·정치적 주요 의제가 되지 못했던 ‘미개한’ 어떤 과거의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여성의 재생산권은 전세계적으로 여전히 뜨거운 인권 의제로 남아 있으며 금지냐 허용이냐 부분적인 합법화냐에 따라 각 나라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의 양상도 달라진다. 불법임에도 낙태 건수가 한 해에 34만 건이 넘고 처벌은 없는 한국 사회에서 낙태는 사회적 안건일 수는 있어도 결코 정치적·철학적 논쟁의 핵심이 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여기에는 특히 남아선호 사상, 이중 도덕, 정책은 난무하되 실행 의지나 능력은 약한 정부, 근대화의 일환으로 거의 1980년대 말까지 추진된 가족계획 사업의 여파 등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여성들에게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인정하고 있어서는 분명 아니다. 오히려 ‘여성의 몸’을 둘러싼 성찰이나 토론, 논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일 확률이 더 높다. 이것은 국제결혼 이주여성들에게서 오로지 한국 시민을 낳아 줄 어머니의 모습만 보려고 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모자보건법 14조 개정안’을 마련 중이란다. 기왕의 예외적 조항에 ‘사회경제적 사유’를 포함시키는 게 현실적이라는 취지에서다. 이제 낙태금지법을 더욱 철저히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기존 보수세력의 반발과 저항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가 관건이다. 차별금지법의 경우처럼 속절없이 항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건복지부 내부에서부터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서 낙태권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한편 여성들을 비롯해 다양한 진영의 구성원들이 참석하는 공론의 장을 많이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낙태금지법에 대한 모든 논의는 기본적으로 그 금지법이 여성의 낙태권, 즉 국가나 그 어떤 규범체계의 개입 없이 자신의 몸을 통해 자기 자신 및 자신의 아이와 직접 관계 맺고 소통할 수 있는 여성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김영옥/이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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