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결국 미뤄왔던 주제를 내밀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주 한 영화 시사회 참석이 그 빌미를 주었다. 무한한 들판과 창공을 생활 터전으로 삼던 야생동물의 생리를 협소한 철창살 안에 가둔 동물원 실태를 다룬 <작별>, 물류와 운송 편이의 논리로 야생동물의 환산 불가한 길죽음(로드킬)을 자초한 산업화의 그늘을 다룬 <어느 날 그 길에서>. 어두컴컴한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코끼리의 무표정과 백색 타일 배경의 지친 원숭이 얼굴은 어느 퇴락한 정신병동 같았다. 동물권 유린의 현황을 기고하는 데 나는 왜 주저했을까? 동물과 인간 사이의 아름다운 공존을 기대할 독자께 이 낯설고 불편한 진실을 요령껏 전달할 줄 몰라서였다.
미디어는 동물을 크게 봐서 교육용, 미담 및 오락용, 엽기 사례로 다뤘다. 첨단 고해상 영상 장비로 문명과 격리된 ‘순정 상태’의 야생을 밀착 취재하는 동물의 왕국류의 다큐멘터리가 교육용. 온실의 화초 같은 반려동물의 재롱에 집중한 것이 미담 및 오락용. 덕분에 생명체를 일개 ‘선물’로 충동구매하고는 무책임하게 유기하는 사태도 이런 방송 편성의 폐단이다. 기르던 개가 성가셔 산 채로 쓰레기통에 버린 철없는 개 주인 이야기나 군부대 이전에 반대하는 집회에 희생양으로 숨이 붙어 있는 죄 없는 돼지를 능지처참하고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시위대의 잔혹한 사진이 엽기 사례다.
그러나 이는 대중적 공분을 유도하지만 볼거리 이상 대안 제시에 미치진 못한다. 동물 수난사가 이 땅에만 유별난 건 아니다. 로드킬의 원조도 산업혁명 전후 내연기관을 발명한 제 1세계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동물 학대의 이론적 근거 또한 경전과 철학서의 비호를 받았다. 구약 창세기는 인류에게 동물에 대한 지배권을 명문화했다. 이른바 근대적 사유를 개척했다는 데카르트는 영혼이라는 ‘전 근대적’ 개념을 도입해 인간과 동물(실은 인간도 동물이건만)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고 영혼 부재의 동물은 통증조차 느낄 수 없는 기계라고 규정했다. 걷어차인 개가 내지르는 비명을 고통의 증거로 보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이런 주장은 이론적으로는 물론 심정적 동의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이 변했고 동물권의 인식도 느리지만 개선된 증거일 게다.
전공을 살려 무리한 비유를 해보면 동물을 대하는 일반론과 미술 감상의 일반론은 꽤 그럴싸한 허구적 공감대 위에 놓여 있다. 보통 관객이 동시대 미술에서 느끼는 거부감은 그것이 즉각적 쾌락을 유발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런 이유로 이해가 상대적으로 쉽고 자신의 무지(?)를 들추지 않는 고전주의 그림에 환호한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의 가치는 눈요기에 머물 수 없는 시각 예술의 현주소를 극단으로 몰아간 결과이고 바로 그 점이 감상 포인트다.
동물권도 유사하다. <동물해방>의 저자 피터 싱어를 인용하면 “서술해야 할 내용이 불쾌한 사실임에도 불쾌함을 숨기면서까지 그것을 어떤 중립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미디어가 포장한 귀여운 애완동물(이 역시 그릇된 표현이나)의 연출 장면은 하늘을 가리는 작은 손바닥이다. 도로변에서 최후를 맞은 희생동물의 개체 수가 2년간 지리산 주변 세개 도로에서 최소 6천건 이상이라는 영화 내용을 접하면, 전국 규모가 짐작 간다. 이쯤 되면 이 문제를 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열정에 일임할 게 아니라, 교육과 국책을 통해 원점부터 성찰할 사안임을 깨닫게 된다. 생태 문제니 동물권이니 하는 구호가 영 생소하다면, 도로 위에서 이들이 누구의 구원도 없이 얼마나 심대한 고통 속에 마지막 숨을 토했을지를 상상하자.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반이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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