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진/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야!한국사회
1991년 3월 어느 날, 새로 산 캠코더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만지작대던 조지 홀리데이라는 사람은 창밖 길가를 보다가 우연히 백인 경찰관들이 한 흑인을 집단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가 정신없이 찍은 촬영물은 나중에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고, 적당히 넘어갔을지도 모를 이 사건은 그야말로 ‘국가적’ 사건이 되었다. 이름하여 ‘로드니 킹 구타사건’이다.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사진이나 동영상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의 증거 노릇을 했다. 하지만 영상 이미지의 엄청난 힘이 항상 진실의 편에만 서는 것은 아니다. 조지 홀리데이의 비디오는 폭행에 가담한 4명의 백인 경찰을 기소하는 데에 결정적 증거물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비디오가 이들에 대한 무죄 판결에도 결정적 구실을 했다. 변호인단은 촬영된 영상물을 정지, 확대, 부분강조함으로써, 로드니 킹은 위협적인 행동을, 백인 경찰관들은 공정한 법 집행을 하는 이미지로 바꾼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 무죄판결은 흑인들의 분노를 유발해 폭동사태로 이어진다. 사흘 동안 50명 이상이 숨지고 2000명 이상이 다친 ‘엘에이 폭동’이다.
디지털 기술은 영상 이미지의 조작을 훨씬 더 용이하게 해준다. 이제는 신문 1면의 보도사진조차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시대다. 명암이나 색상 보정 정도야 별 문제의식 없이 하니까. 하긴 누군가가 찍고 편집했다는 사실 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은가. 더구나 도처에 카메라가 있는 현실이다. 이미지를 읽고 소화하고 대처하는 능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뽀샵질’을 했는지 여부를 가려내는 능력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지난달 23일,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다리를 ‘폰카’로 촬영한 피고인에게 대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사진 속 이미지가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판단의 주요 근거였다고 한다. 네티즌 사이에는 다리가 성적 관심을 끄는 신체부위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있는 모양이다. ‘페티시즘’을 거론하며 판결을 비판하는 글도 있고, 짧은 치마 입은 여성을 탓하는 시대착오적인 의견도 꽤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법적 공방에 그칠 사건도 성적 쟁점만을 제공하는 사건도 아니다. 시각적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에 관한 생각 거리를 던져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그냥 보는 행위와 다르다. 들여다보는 행위이다. 뚫린 구멍을 통해 반대편을 보는 ‘피핑’(peeping)과 유사하다. 거기에는 이미 관음적 성격이 내재되어 있다. 수영장에서 비키니 입은 여성을 흘깃 쳐다보는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나를 ‘몰래 들여다본다’는 것은 성적 욕망이나 프라이버시를 따지기에 앞서 ‘기분 나쁜’ 일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이미지가 생산되어 내 의사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은 나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일이다. 법적으로 뭐라 하든 간에.
이번 판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까운 어른 한 분이 말씀하셨다. 법적으론 무죄가 되는 게 맞는 것 같지만, 만약 내 아들이 그런 짓 하고 돌아다닌다면 혼쭐을 내주겠다고. 아, 맞는 말이다. 무죄라고 결백한 것은 아니다.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관해 고민을 하지 않은 죄는 분명하지 않은가.
법정에서 증거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때론 진실과 무관한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 영상 이미지다. 진실과 조작, 그리고 관음에 대한 고민은 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 개개인에게 주어진 숙제다. 이 나이에 숙제라니. 영상 시대에 사는 벌이려니 한다.
윤태진/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윤태진/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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