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지난 5일 어느 미국 원로배우의 부고를 실은 <시카고 트리뷴>은 비평가의 인용을 빌려 “신과도 같은 영웅적 외모”에 “미국인의 승리에 대한 원조”로서, 천부적 카리스마를 갖췄다며 생전 고인을 기렸다. 스크린 속 그의 배역은 이런 평가에 근거를 싣는다. 르네상스 천재 미술인 미켈란젤로, 7대 미 대통령 앤드루 잭슨, 유대 민족 지도자 모세, 세례 요한, 영국왕 헨리 8세, 급기야 ‘신’으로까지 그는 등장했다. 흔히 영화 <벤허>로 기억되는 그는 찰턴 헤스턴이다.
인물평에 이처럼 동원되는 카리스마란 무얼까?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구분한 권위의 세 등급에도 카리스마는 “이례적인 신성과 영웅성에 의존한” 권위로서 이성적 권위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 설명된다. 그리스어 어원 ‘신의 은총’에서 비롯하는 점에서 다분히 종교적 뿌리를 갖는 셈이다. 언변의 논리성보다 좌중의 시선을 잡아끄는 카리스마의 감각성을 언론은 선호한다. 대중 흡인력을 높이는 가장 단순한 해법이어서다.
그런데 나는 평소 카리스마의 호의적 용례가 늘 못마땅했다. 그것의 유사 종교성이 이성적 여론 형성의 구조를 위협하는 공중의 맹목 같아서다. 용례로 거론되는 오피니언 리더들을 살펴보자. 악성 루머를 반박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나훈아가 보여준 무대 매너는 대통령을 능가하는 카리스마로 주목받았다. 영화배우 최민수의 내리까는 눈매와 말투도, 대중 동양학자 김용옥의 고함과 성토로 가득 찬 방송강의도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이들이 쌓은 공적과 자부심을 부인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회견장에서 부릅뜬 눈초리와 연극적 몸짓으로 해명에 성공한 나훈아가 내겐 한편 신파 배우처럼 보였다. 극과 현실을 분간 못하는 최민수의 언행도 가부장주의의 안간힘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강준만의 지적처럼 김용옥의 열강은 강의 내용보다 유사종교적 매력 때문에 청중을 사로잡는 것 같다. 이들이 보여준 카리스마의 본질은 선동가 아돌프 히틀러나 전설의 히피 교주 찰스 맨슨에게도 비슷하게 관찰되는 바다. 수감 중인 허경영도 한때 카리스마의 전형으로 회자되었다! 카리스마가 맹목적 ‘성도’를 거느리는 원동력은 진실보다 비논리적일지언정 믿고 싶은 바를 따르려는 군중의 속성에서 나온다.
카리스마에 대한 눈먼 열광은 대의 민주제에도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점퍼 차림 노회찬과 귀족 이미지 홍정욱을 놓고 보자. 홍 후보의 승리로 끝난 선거전을 보혁 또는 시장주의와 분배주의의 대결로 언론은 풀이하지만, 출마자의 성분 분석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유권자의 처지에서 이는 카리스마 대 합리주의의 구도였다고 나는 해석한다. 하버드 1등이므로 세계 1등일 거라며 흥분하고 얼굴이 너무 잘생겨 찍었다는 홍 후보 지지자들에게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희구하는 카리스마 중독의 그늘을 본다. 정작 문제는 유권자의 카리스마 중독이 4년 뒤 치유될 가망이 있느냐는 것이다. 입증된 반박자료에도 황당한 믿음이 꾸준히 통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서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탓이다.
<벤허>와 <십계>에서 찰턴 헤스턴을 카리스마적 영웅으로 각인한 내 유년의 인상도 2003년 <볼링 포 콜럼바인>을 통해 많은 부분 수정되었다. 전미 총기협회 회장을 3년 연임한 그는 콜럼바인 총기 사태 발생지에서까지 총기 소유 합법화 집회를 이끌어 피해 가족의 원성을 사며 추하고 오만한 노인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극중 배역과 실제 품성 사이의 혼돈과 착오는 비단 특정 배우의 인물평에 국한되지 않으며 모든 상황 판단 속에 반복된다. 이런 혼란을 유도한 것이 카리스마적 미혹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고 성찰하자.
반이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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