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논설위원
유레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조선 사절단이 티베트의 법왕인 판첸라마 6세인 반선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청나라는 당시 티베트 통치의 수단으로 불교 지도자를 중앙에 불러 황제 곁에 두고 나름대로 우대함으로써 복종케 하려는 회유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 각국 사신들을 판첸라마에게 보내 고개숙이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유학자의 눈에 판첸라마는 이단자일 뿐이었다. 따라서 사절단은 처음에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찾아가지 않았지만, 이를 눈치 챈 건륭제가 “당장 찾아가라”고 진노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군기대신이 수건을 받아들고 반선의 오른편에 섰다. 사신이 돌아서서 나오려 하자 군기대신이 오림포(청나라 통역관)에게 눈짓으로 사신을 중지시키게 했다. 사신이 절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사신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나 수가 놓인 검은색 비단 요를 깔고 앉은 몽고왕 아랫자리에 앉았다. 앉을 때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소매를 들었다가는 그대로 앉았다. 군기대신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지만 사신이 이미 앉았기에 할 수 없이 못 본 체 했다.”
사절단 대표인 연암의 삼종형 박명원은 판첸라마를 만나기는 하되 고개는 숙이지 않은 것이다. 황제의 요구에 따르면서도 유교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저께 아키히토 일왕을 만나면서 고개를 거듭 숙여 인사했다. 반면에 일왕은 내내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모습이 텔레비젼에 비췄다. 상호 존중하는 만남의 모습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허기야 이 대통령의 ‘별난’ 인사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당선자 시절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에게 일방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적도 있다. 고개 잘 숙이는 이 대통령의 모습을 연암이 봤다면 뭐라고 할까.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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