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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대중지성과 촛불 민주주의 / 고명섭

등록 2008-05-13 19:33

 고명섭 책·지성팀장
고명섭 책·지성팀장
한겨레프리즘
대중은 20세기 현상이다. 정치의 지각을 뚫고 일어선 대중의 출현에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귀스타브 르 봉은 <군중심리>에서 대중의 맹목성과 수동성을 분석했다. 대중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경멸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의 반역>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대중이 정치의 주체이자 주인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때의 대중은 익명성과 평균성을 본질로 하는 대중이다. 대중은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괴력의 존재이지만 그 존재 안에는 지성이 결여돼 있었다. 뇌는 없고 힘만 있는 괴물이 그가 발견한 대중이었다.

오늘 우리는 대중과 지성의 결합, 곧 대중지성의 등장을 본다. 대중지성이라는 새로운 현상 앞에서는 르 봉의 설명도 가세트의 해석도 낡은 것이 돼 버린다. 촛불을 켜 들고 자기 얼굴을 비추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맹목의 군중, 사나운 폭도를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작은 불꽃들이 모여 어둠을 밝힌다. ‘촛불 민주주의’라고 해도 좋을 현상이다.

대중지성은 말하자면, 촛불의 네트워크다. 청계천에서 3만 개의 촛불이 타오르기 전에 인터넷에서 수십만, 수백만 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한국 정부의 졸속협상·자화자찬·감언이설, 은폐와 변명을 낱낱이 적발·해부해 퍼뜨린 것은 인터넷 대중이다. 어떤 이는 광우병 위험을 알리고 어떤 이는 검역주권을 문제삼고 어떤 이는 합의문 내용을 분석하고 어떤 이는 정부의 앞뒤 안 맞는 해명을 추적한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퍼 나르고 댓글을 달고 문자를 보낸다. 지도부도 없고 관제탑도 없지만, 촛불만한 관심과 열정과 분노가 모여 거역할 수 없는 집합적 지성을 이룬다. 우리 뇌가 수없이 많은 뉴런의 집단 활동으로 창조성의 불꽃을 피우듯이, 인터넷상의 수많은 뉴런들이, 수많은 촛불들이 하나로 연결돼 거대한 지성을 산출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네그리와 하트는 말한다. “만약 천재적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대중의 천재성이다.”

그 지성의 힘이 현실의 정치권력을 흔들어 놓는다. 이명박 대통령의 누리집이 초토화되고, 대통령 탄핵 서명자가 130만 명을 넘어섰다. 대중지성의 위력에 당황한 정부는 배후를 찾는다고 법석을 떨었다. 배후 세력도 없고, 음모의 중심도 없다. 음모자가 있다면, 인터넷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음모자다. 인터넷을 통째로 철거하지 않는 한, 분노한 시민의 마음을 모조리 적출하지 않는 한, 음모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중지성은 네트워크 지성이다. 네트워크는 체로 걸러내듯 오류를 스스로 걸러내며 진화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지성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뉴런의 총합인 우리 뇌가 총기를 잃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하듯이, 대중지성이 자기 정화의 긴장을 놓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촛불이다. 촛불은 세상을 밝히기에 앞서 자기 얼굴을 밝힌다. 자기를 먼저 투명하게 내보인다. 그 투명함에선 거짓도 기만도 자라지 않는다. 정치가 앨 스미스는 이런 말을 했다. “민주주의의 해악을 치료하는 유일한 치료제는 더 많은 민주주의다.” 이명박 정부를 낳은 것도 민주주의이고 거기에 대항해 일어선 것도 민주주의다. 제도 민주주의의 결함을 메우고 극복하는 것은 촛불 민주주의다. 국가지성이 구멍 숭숭 뚫려 멋대로 날뛰고 고꾸라지는 걸 막으려면 대중지성이 더 많은 촛불을 들어야 한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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