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유레카
“길에서 밤을 지새우는 거지조차도 정치 문제를 명쾌하고 열정적으로 논할 정도였다.” 주한 미국 대사관 문정관으로 일하던 그레고리 핸더슨이 1951년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한 뒤 이렇게 썼다. 그 무렵,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정치에 관심을 쏟았을까? 그것은 한국인들이 중앙권력의 향배에 따라 생명을 포함해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시대를 살아온 오랜 역사의 산물이라고 핸더슨은 봤다. 그는 한국의 정치문화를 중앙 권력에 모든 것이 휘말려 들어가는 이른바 ‘소용돌이의 정치’라고 표현했다.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 사라지는 듯하던 ‘소용돌이의 정치’가 부활하고 있다. 대통령이 바뀌자 헌법에 임기가 보장된 헌법기관의 수장에서부터 공공기관, 옛 공기업의 임원 자리까지 대통령의 사람들로 깡그리 바뀌고 있다. 정책 결정과 집행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은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밀어붙인 뒤, ‘수입위생조건을 재협상하라’는 절대다수 국민의 반발을 한쪽 귀로 흘려 버린다.
카를 비트포겔은 <동양적 전제주의>에서 “전제군주를 선거한다고 해서 그가 덜 폭군적으로 되거나 온화해지지는 않는다”고 썼다. 21년 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힘겹게 민주화를 일궈놓고도, 우리는 아직 ‘왕’을 뽑고 있는 것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듯하다.
어린 초등학생조차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이는 “거지도 정치를 논한다”던 핸더슨의 관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 현상이다. 촛불은 ‘더는 전제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서울 시청앞 광장을 한 달 넘게 뒤덮고 있는 촛불의 물결 속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노랫말이 울려퍼진다. 단지 종이 위에 쓰인 문장에 불과한 헌법 대신, 국민이 내용을 채운 진짜 헌법이 비로소 탄생하고 있다. 이것은 조용한 혁명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