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영 고려대 사회학과 강사
야!한국사회
오랜 농담 하나. 선생님 저희 집은 굉장히 가난해요. 저희 가정부도 가난하고 운전사도 가난하고 정원사도 가난하답니다. 나는 지금 그 농담이 정겹다. 부자라고 으스대는 게 ‘우끼고 자빠진’ 그런 한때가 있었나 싶다. 시절은 변해 나도 실은 돈 밝히는 속물이라고 너도 나도 떠벌리고 있어 보이기 위해 외양을 치장하는 것이 일상의 중대 미션이 되었다. 가난에는 온갖 스티그마(오점)가 붙었다. 시장에서 실패한 것에 인격적 모욕을 가하는 비정한 사회가 된 것이다.
통계청 발표로, 상위 20% 계층의 소득을 하위 20%의 것으로 나눈 5분위 소득배율이 8.41이고 이는 관련 통계를 낸 이래 최고치란다. 좋다. 소득 불평등 심화는 새삼스러울 것 없다. 내가 놀란 것은 구체적 수치였다. 하위 20% 월평균 소득이 86만9천원이다.(상위는 731만2천원) 1인가구는 제외했단다. 한 달 87만원! 가난한 사람이 자기 집 지녔을 리 없으니 주거비가 뭉텅 빠져나갈 거고, 그러고 남은 몇 십만원으로 최소 두 명이 한 달 생활을 어찌 꾸려 나가는지 당최 산수가 안 된다.
결론은 굶기를 밥 먹듯 한다는 것일까. 늦둥이인 나는 엄마 젖을 구경도 못하고 암죽을 먹고 자라 워낙 근기가 없어서인지 한 끼도 못 거른다. 아니, 배꼽시계의 아우성을 십수 분 무시하면 뻗치는 신경질과 식은땀으로 거의 헐크 수준으로 인간이 나빠진다. 이런 나로서는 다가올 끼니를 때울 방도가 막막할 만큼 가난한 사람이 우리나라 인구의 십여 퍼센트라는 것은 거의 추문처럼 들린다.
가난은 왜 그토록 눈에 띄지 않는가. 우리나라 잘살게 됐다고 깜빡 속을 뻔하지 않았나. 우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시간대에 다른 동선을 그리며 벌어먹다가-그들은 대부분 일하는데도 가난한 노동 빈민이다-다른 공간으로 들어가 잔다. 가령 대학 청소부들, 새벽 5시부터 강의실·화장실 청소하고 학생들 오기 전에 사라진다. 계층간 주거 분리는 이미 상당한데 도처의 재개발 사업으로 깔끔하게 완성될 것이다.
한편, 가난한 이들은 고도 소비사회의 규범인 선택의 자유를 이행하지 못한다. 현대의 중요한 사회적 행위는 무엇을 선택해 사고 갖고 쓰며 자아를 전시·주장하는 것이니 가난한 이들은 희소하게 행위하고 희박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래서 그들은 사회관계에 들어갈 입장권과 장비가 부족하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한 아이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해 세 들어 사는 판잣집은 빗물이 줄줄 새고 할머니는 이가 없어 총각김치를 물고 절절 매는데 친구에게 돈을 꿔 휴대전화를 산다. 철없다? 그 번호로 취업 면접이 들어올 수 있고 유일한 사회자본인 친구들과 연락할 수 있는데? 여상을 졸업해 ‘적’이 없어진 그에게 휴대폰은 사회와의 연결선이다. 그마저 없다면 그는 지금과 향후의 사회관계에서 누락될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적 사망 선고. 그래서 현대의 가난은 식비를 줄여 ‘휴대전화’를 장착한다.
그리하여 가난한 이들은 아는 이가 적고 교제 범위가 좁다. 그의 사회적 관계는 자본(빽, 인맥)이랄 수도 없이 초라하고 무력하다. 거부와 모욕 속에 그의 사회적 우주는 나날이 줄어들고 급기야 그는 한곳에 붙박인다. 이 유목민 시대에. 하여 가난의 모습은 어두운 반지하 원룸에 한없이 켜 있는 텔레비전, 컴퓨터와 그 앞에 홀로 앉은 한 사람이다. 사회적인 시간, 공적인 공간에 빈곤은 출현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인가? 안 보여 더 참혹한 가난이 도처에 있다.
김미영 고려대 사회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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