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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온몸으로 말하는 기륭 노동자들 / 박수정

등록 2008-08-04 21:43

박수정 르포작가
박수정 르포작가
야!한국사회
집을 나선다. 가리봉 시장을 지나 오거리에서 수출의 다리 쪽으로 걸으면 2공단 네거리.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한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이 있던 길, 2공단과 3공단 길에는 무수한 노조들이 있었다. 당연한 권리지만 노조를 만들면 해고당하고, 투쟁하면 머리채 잡혀 질질 끌려가는 일, 무지막지한 주먹에 시퍼렇게 멍드는 일, 난지도며 고속도로 한가운데 버려지는 일이 숱하게 벌어져도, 다음날이면 회사 앞에 나가 출근 투쟁하던 사람들이 있던 길.

그 길은 이제 이름도 모습도 달라졌다. 그런데 노동자로 사는 일이 힘겨운 건 여전하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해고, 비인간적이고 차별적인 대우는 지난 시절에 한정된 말이 아니다. 그 무게에 짓눌려 도저히 안 되겠다고 노조를 만들면 노조가 무슨 적이라도 되는 양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자본가의 모습도 똑같다. 공단이 디지털단지로, 공장이 유리빌딩으로, 삶은 달걀을 팔던 매점이 이름 있는 음식점이나 커피집으로 바뀌는 동안, 자본가나 자본가를 가장한 투기꾼이 공장 부지를 팔아 거대한 이득을 얻는 동안,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으로 내몰렸다. 노동할 의무는 있되 노동자의 권리는 없는, 일회용으로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처지로.

그 길을 걸어서 가면 어디쯤에선가 멈추고 되돌아설 것 같아 택시를 탄다. 일요일로 54일째 단식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기륭전자. 모든 조합원이 시작한 단식, 이제 두 명 남았다. 지난 금요일에 병원으로 실려 간 노동자는 몸이 음식을 거부해 계속 토한단다. 분회장은 전화로 오늘은 어떠냐고 묻고 다른 조합원이 챙겨 간 미음과 된장국을 숟가락에 묻혀 조금씩 먹어보라고 일러준다. 자신도 심장이 안 좋고 기력이 떨어지면서도 세심하게 사람을 챙긴다. 조합원들은 몸이 쓰러져 단식을 멈추었지만 모두 단식 중이나 마찬가지다. 병원에 있는 동료들이, 옥상에 남은 두 동료가 아픈 만큼 모두 아프리라.

지난 금요일 기륭 조합원들은 종교계와 사회단체 대표로 이루어진 공동대책위와 함께 국회에 갔다. 벌써 오래전부터 사회문제가 된 기륭 문제를 해결하자고 민주노동당, 민주당, 한나라당 원내대표실을 찾아 면담을 요청했다. 한나라당 쪽은 문을 열지 않고 “절차”를 말했다 한다. 절차를 밟아도 묵묵부답이던 이들이. 한나라당은 절차가 아니라 50일 넘게 단식하는 노동자들을 걱정하는 말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앞서 한 차례 만난 일이 있어 기륭 문제를 모르는 것도 아니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해결하자고” 했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말은 정치적인 수사였을까. 끝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했다. 토요일 밤, 마찬가지로 절차를 말했던 국회 사무처는 공권력을 동원해 단식농성하던 이들을 연행하게 했다. 늘 그런 식이다. 정부도, 국회도, 사법부도 노동자에게만 엄격하게 절차와 법을 들이댄다. 노동자에게는 가로막혀 있고 꼬여 있고 냉정한 절차와 법. 3년이 넘는 동안 기륭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생존이나 권리를 무시하며 저 높은 곳에 있는 절차와 법 앞에서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국회에서 그이들을 들어냈다고 기륭 노동자들의 문제가, 비정규직의 문제가 사라질까.

쉽사리 뒤돌아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 우리 신화에 나오는 뼈살이꽃, 살살이꽃, 피살이꽃이 떠오른다. 기륭 노동자들을 살릴 이 꽃들은 오래전 서천꽃밭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한테 있을 것이다. 앙상해진 저들에게 이 꽃들을 안기면 이 사회는 숨살이꽃, 혼살이꽃을 얻을 것이다. 기륭 노동자들은 지금, 이 시대를 온몸으로 말한다.

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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