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 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귀족의 개인 소장 취미가 제도적으로 변형 수용되는 과정 속에 오늘날의 미술관도 탄생했다. 소장품의 분류 및 전시를 통해 국가기구의 위상은 과시되고 관람자에겐 규범이 요구되는 이 근대적 기관은 ‘세속화된 사원’으로 평가절하되곤 한다. 일반인에게 이런 해석은 금시초문일 게다. 미술관의 유해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최종 결과물 집결, 비평의 집필 동기 제공, 미술 시장의 유행 확인에 이르기까지 미술관의 존립은 미술 자체의 존재 이유와 함께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업 미술인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정일 뿐이다.
반면 시민사회에 미술관은 무엇일까? 진솔히 말하면 통상 관심 영역 밖의 공간이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오는 10월 경기 과천으로 이전하는 기무사의 소격동 터에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이 최근 미술계 일각에서 일고 있다. 발기인 명단이 적힌 연판장도 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분관 논의는 1986년 현재의 과천 청사로 이전한 이래 줄곧 있어왔다.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게 주된 이유다. 추종하는 미학과 정치성향이 상반되는 미협과 민미협마저 이 부분에선 의견 일치를 볼 정도다. 어쨌건 ‘기무사 미술관’ 안건이 새롭진 않다. 이에 일견 공감하는 일인이지만 서명에는 불참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아직까지 발기인 중 미술인 수가 태부족인데 이는 홍보 부족 탓일까? 그보다 관치 문화행정이 신뢰 쌓기에서 장기적으로 실패한 결과라고 나는 이해한다. 서울분관 건립의 논거는 서울 도심 국립미술관 부재 해결, 재건으로 문화콘텐츠 창출과 관광객 유치 등이다. 그런데 나는 평소 서울에만 미술관이 편중돼 있다고 느껴온 터다. 세종로 가까이에 국·공립 미술관이 두 군데, 대기업 운영 사립미술관은 줄잡아 5곳 이상 포진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전시 공간만 놓고 볼 때 과천 미술관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물론 오너의 사유재산 같은 사립미술관보다 국고의 안정적 지원으로 운영되는 기관의 필요성에는 통감한다. 하지만 국립미술관의 지난 성과가 ‘지리적 난점’ 하나만 빼면 공·사립 미술관 및 유수의 갤러리보다 월등히 능가하는 미학적 성과를 내놨는지 따져야 한다. 이게 바로 신뢰 회복의 시작이다.
둘 사이에 큰 편차를 발견하긴 어렵다. 또 분관 건립의 범례처럼 비교되는 유럽을 보자. 도시 재건 계획의 일환으로 기차역을 인상주의 전용관으로 변모시킨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나, 화력발전소를 현대미술의 ‘용광로’로 개장한 런던 테이트 모던이 성공 사례다. 그렇지만 이들에게서 ‘기무사 미술관’이 취할 교훈이 많아 보이진 않는다. 층 낮은 기무사 건물이 ‘건축물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동시대 실험 미술의 전시장으로 용도변경 될지도 의문이지만, 서양미술사의 진원지인 국가들과 한국을 동일한 문화 소비의 무대로 설정한 것도 무리다. 또 강변을 끼고 시내를 조망하는 오르세 미술관이나 테이트 모던의 지리적 이점을 우중충한 전경 닭장차가 줄줄이 상시 주차 중인 소격동 거리가 올바로 살려낼지 걱정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서울분관 논의가 구체적인 전망 없이 진행되는 것이 우려된다. ‘1시도 1미술관 건립’을 목표로 2000년대 초반 이래 많은 공립미술관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전시행정으로 비판받는 예가 더 많다. 미술관의 추가 건립은 통상 시민사회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터 확보의 중요성은 이해하지만 그보다 신뢰 쌓기가 먼저다. 관치의 잔재를 청산해서 학예사의 기획력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20분에 한 대꼴인 국립현대미술관행 ‘시골버스’의 운행도 전면 재고하자. 가시적 진전이 있을 게다.
반이정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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