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유레카
일본 전국시대에 농민들이 지배 무사 권력에 항거해 폭동(잇키)을 일으키는 일이 잦았다. 권력자들은 농민들의 요구가 설령 합당해 받아들일지라도, 주모자만은 반드시 처형했다. 그러자 농민들은 ‘가라카사 연판장’이란 걸 활용했다. 가라카사는 ‘종이우산’이다. 펼쳐진 우산의 살 위에 방사상으로 쓰듯, 연판장에 참여자들의 이름을 적으면 위아래나 좌우를 구분할 수 없다. 누가 주모자인지 알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는 곳은 달라도 사람들의 지혜는 비슷하게 발달한다. 조선에서는 사발통문이 쓰였다. 통문은 어떤 일을 함께하고자 여러 사람의 뜻을 모은 알림글이다. 사발통문은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게 사발을 엎어놓고 그린 원을 중심으로 둘러가며 이름을 쓴 통문이다. 동학 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고부 봉기 때, 전봉준 등 20명이 서명해 각 리의 집강들에게 보낸 사발통문이 좋은 보기다.
애초 사발통문은 계모임 등에서 합의서를 만들 때 등에도 많이 쓰던 것이었다. 그것이 정치적 행동을 조직하는 데 자주 활용되자, 조선 정부는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부터는 사발통문을 돌리기만 해도 역모로 보아 처벌했다.
군사정권 시절이던 1970~80년대에도 격문에 서명자의 이름을 ‘가나다’ 차례로 써서, 주모자가 드러나는 것을 피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굳이 자신의 이름을 숨겨가며 사람들에게 격문을 돌릴 일이 드물어졌다. 언론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가 그만큼 확장된 까닭이다.
그런데 세상은 가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한다. 엊그제 경찰이 인터넷 사이트 아고라에서 활발하게 글을 쓴 한 논객을 두고 촛불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반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본보기로 삼으려는 것일 터이다. 이제 인터넷에 쓰는 글에도 사발통문에 쓰듯 여러 사람이 서명을 해야 할 모양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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