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 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집 떠나는 걸 좀체 즐겨 하지 않지만 지난주 사흘여 영호남을 가로지르며 과로를 자초했다. 격년제 미술행사인 한국발 비엔날레가 광주와 부산에서 연이어 개막해서다. 출품작과 전시관 규모가 덩치를 불리는 추세라, 하루 일정으로 비엔날레를 소화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또 출품작의 성격상 대체로 눈감각이 혹사되는 탓에, 나머지 감각이 소외되면서 나타나는 묘한 피로감도 경험한다.
마지막 일정이던 부산에서 ‘바다 미술제’를 둘러보다, 초대된 어느 영상 작품 앞에서 누적된 피로감이 한시적으로 풀리는 체험을 했다. 전시장 사면에 4채널로 영상을 투사하는 이 문제작은 유럽 각 도시에서 공개모집으로 결성된 아마추어 합창 단원들이 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개최하는 장면을 담은 게 전부다. 흥겨운 합창곡 선율이 시감각에 집중된 신경을 분산시켜 얻은 긴장 완화도 신선함에 한몫했으리라.
그렇지만 진짜 관람의 핵심은 가사에 있다. 해당 지역민이 평소 느껴온 상투화된 불평과 불만을 이어 붙여서 작사한 것이다. 이 단체는 이름하여 ‘불만 합창단’이다. 가사 일부를 소개한다. “자전거 도로랍시고 만든 게 죄 컴컴한 터널투성이에 바닥엔 구멍이 1000여개나 뚫렸네. 약속 지키는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고, 시장이란 자는 항시 도시 개발 생각뿐. 좋은 영화는 하필 늦은 밤에 상영하지.”(함부르크 불만 합창단), “버스 기사는 하나같이 무뚝뚝해. 내 컴퓨터는 엄청 느려 터졌어. 시내에서 파는 맥주는 터무니없는 바가지야. 특대 사이즈 광고게시판 꼴도 보기 싫어.”(버밍엄 불만 합창단)
복지와 후생에서 상대적으로 나을 거라 막연히 믿었던 유럽의 사정도 비슷하다는 생각에 뒤틀린 안도감마저 느낀다. 풍부하달 수 없는 가창력, 단출한 건반 악기 한 대로 반주를 대신한 소 편성, 평상복 차림 단원, 때론 영아를 안고 합창 대열에 선 주부까지 보인다. 효과음을 위해 꺼내든 확성기도 돌출한다. 전형적인 거대 제도권 예술 행사의 출품작 안에서 자발적 시민 동참으로 완성시킨 ‘준’ 아마추어리즘이 토해내는 차별화된 저력! 이것이 제도 예술의 아성을 위협한다거나 그것을 대체할 수준이라 우기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러나 경직된 동시대 미술의 갑갑함에 청량제로서뿐 아니라 신중한 경고 기능을 수행하는 건 명백하다. 물론 공룡처럼 커버린 제도 예술이 이들의 출현을 경고로 접수할 공산은 희박하지만.
그래선지 이런 발칙한 예술은 적막감 도는 전시장보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서 발견해 유포하면서 ‘간접 참여’의 흥미를 맛보는 편이 낫다. 공공예술의 범주로 정의되는 이런 공동체의 협업은 2000년대 이후 자주 언론을 탔다. 2003년 첫 보도가 나간 플래시 몹도 동일한 발상에서 비롯된 집단 유희극이다.(불만 합창단은 2005년 최초 결성) 현재 세계 16개 도시에서 결성된 불만 합창단을 국내에선 ‘희망제작소’가 기획 중이다. 현재 단원 모집을 마치고 연습 중인데, 10월 중 서울 도심에서 선보일 예정이란다. 불만에 더해 분노까지 산적한 한국 사회에서 서유럽 강국 합창단에 필적할 폐부를 찌르는 가사와 화음을 갖춘 토종 불만 합창단의 출연을 기대해 본다. 작사를 위한 공개 불만 접수 기간을 마감했다 하니, 지면으로나마 내 불만도 하나 보태 본다. 엠비(MB)가 군중을 향해 곧잘 취하는 자세가 있다. 두 손 모아 정수리를 향해 엉성한 하트 모양을 만들어 애정 표시하는 거. 부디 이 자세는 ‘국민과의 대화’ 이후 자제했으면 한다. 왜인고 하니 솔직히 안 어울려서다. 보는 사람, 멀미 나게 해서야 되겠는가?
반이정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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