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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민주주의 전선의 재구성 / 고명섭

등록 2008-09-16 19:37

고명섭  책·지성팀장
고명섭 책·지성팀장
한겨레프리즘
참여정부 말기에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한나라당도 집권할 수 있어야 하며, 그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경향신문> 2006년 9월28일치)라고 말했다. 중량 있는 학자의 그 발언은 민주·진보파 진영에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치학자 손호철 교수는 몇 달 뒤 “한나라당에 정권이 넘어가면 한국 정치가 중장기적으로 오히려 발전할 수 있다”(<레디앙> 2007년 1월31일치)라고 한발 더 나아갔다. 이들의 주장에 민주·진보파 안에서도 상당수가 공감했고, 결과는 한나라당의 집권이었다.

이런 발언들은 한국 민주주의가 지난 10년의 민주파 집권으로 어느 정도 토대를 굳혔다는 판단에 입각한 것이었다. 한나라당에 정권이 넘어가더라도 민주주의의 기초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몇 달의 한국 정치 경험은 우리 민주주의가 생각만큼 굳건하지 못하다는 뼈아픈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최 교수나 손 교수나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실패한 데서 참여정부의 근본적 패인을 찾았다. 복지·노동·분배·교육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 민주정부의 과제인데, 이 지점에서 야당과 정책 차이가 크지 않다면 정권이 바뀐들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진단이었다. 작금의 상황은 이런 진단이 냉철한 현실인식 위에 선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민주파든 반대파든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 원칙만큼은 공유하고 있다고 본 것인데, 그런 판단에 착오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해 당사자들이 ‘민주주의 규칙’을 엄격히 준수할 때에만 원리대로 작동한다. 이때 민주주의 규칙은 단순히 제도나 절차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의 심성과 에토스로 존재한다. 제도와 절차가 마련돼 있다 하더라도 행위자가 민주주의를 내면화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규칙 준수자를 파트너로 삼는다. 한나라당 집권 반 년 만에 한국 민주주의는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회·경제적 민주화 과제가 철거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집회·사상·양심의 자유와 같은 헌법적 기본권마저 심대하게 위협받고 있다. 미라가 된 줄 알았던 국가보안법이 백주에 으르렁거리며 날뛴다. 검찰·경찰의 행태는 과거 공안정권의 수족을 닮아가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임기 말 노무현 정권의 일탈적 행보를 두고 ‘사이비 민주주의’에 견주었다. 최 교수의 논법을 빌리면 지금 정권은 ‘사이비 민주주의’ 정도가 아니라 ‘반민주주의’라고 해야 할 판이다.

돌이켜보면,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 정치를 규정한 기본적 틀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였다. 그 구도가 낡았다고 부정하고서 사태를 ‘좌파 대 우파’로 재규정한 것은 한나라당과 그들의 대변자들이었다. ‘좌파가 망친 경제, 우파로 되살리자’가 한나라당의 구호였고, 그 구호가 먹혀들었다. 그러나 그 구호야말로 가짜 구호다. 열린우리당더러 좌파라고 하면, 서구 좌파들이 황당해할 일이다. 민주주의 역량의 미달과 부실이 문제였을 뿐이다. 민주파가 실망스럽다고 해서 반대파에게 권력을 넘겨준 재앙적 결과를 지금 우리는 겪고 있다. 경제 위기가 심해지고 남북 긴장이 격화하면, 경제 우선이니 안보 우선이니 하며 민주주의 남은 원칙마저 내다버릴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더 붕괴하지 않도록, 민주주의 전선을 재구성해야 할 상황이다. 시민 중심이냐 의회 중심이냐 하는 것은 둘째 문제다. 민주주의의 생환이 중요하다.

고명섭 책·지성팀장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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