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칼럼
추풍에 낙엽 지듯 별들이 떨어지는 날들, 문득 시조시인 조오현의 시편 하나 떠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해 떠오르는 쪽으로/ 중들은 해 지는 쪽으로/ 죽자 사자 걸어만 갔다// 한 걸음/안 되는 한뉘/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인데”(<제자리걸음> 전문)
새삼 별들의 제단에 덧없음 한 자락 더 깔려는 건 아니다. 의상 대사가 저 장대한 화엄경의 가르침을 줄이고 줄여 8자에 담아낸 것이, 행행도처(行行到處), 지지발처(至至發處)(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 가도 가도 떠난 자리)였다. 인생무상과 무관하다. 죽자 사자 수행하고 살아온 이들만이 확인하는 본래 제 자리, 제 면목이니,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나 할까.
최진실의 선택이 아쉬운 것은 그런 까닭이다. 삶의 온갖 역경을 이기고, 배우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구김살 없는 모습으로 대중의 희로애락을 대신 살아주던 그였으니, 대중이 그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하지만 그의 돌연한 선택은 남은 이들의 삶을 초라하고 구차하게 만들었다. 그 앞에서 존엄한 삶 운운하는 것이 실없다.
애써 떠올린 그에 대한 헌사가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의 중간에서 끝나버리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 오고 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을 살어 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떠나기 전 그는 세상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했다. 세상의 애정과 선망과 칭찬은 언제나 증오와 질투와 비난과 짝을 이뤄 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저 홀로 높고 외롭고 쓸쓸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반전은 그의 몫일 수 없다. “(그리고 이번에는)/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시는 결국 가물거리는 초생달, 보잘것없는 바구지꽃, 그리고 한평생 짐을 실어 나르는 당나귀처럼 낮고 가난한 삶에 대한 헌사였던 것이다. 그런 삶을 이웃에서 찾는다면 이런 사람들이겠다. 노동자로서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기륭전자의 권명희씨, 그는 해고 뒤 암 투병 속에서도 동료들과 함께 싸우다가 지난달 작고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동료의 존엄한 삶을 위해 90여일간 단식농성을 했던 김소연 분회장. 공정한 방송 종사자로서 자존감을 지키려 80여일째 권력과 맞서다 해고당한 와이티엔 사람들과 단식농성 중에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간 황혜경·박소정씨. 바구지꽃 같고, 짝새 같고, 당나귀 같은 이들이다.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내뱉은 적이 있다. “왜 나는 아직/ 40대 소작인의 처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제나 따스한데” 그건 탄식이 아니다. 독식과 착취, 억압과 차별, 폭력과 소외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그건 ‘하늘이 귀해하는’ 이가 지켜야 할 도리일 뿐이다.
찬 이슬 속에서 이 가을 황량한 산기슭과 들녘을 지키는 감국 산국 쑥부쟁이 벌개미취 구절초 등 들국화를 손꼽아 본다. 그리고 나와 이웃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그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이들의 이름도 하나 둘 써본다. 권명희 차봉천 김소연 황혜경 박소정 오미선 …. 혹은 떠났고 혹은 남아 있지만, 언제나 사랑과 슬픔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 경의를 표한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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