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논설위원
유레카
귀얄은 옻칠을 하거나 풀을 바를 때 쓰는 붓이다. 벽지나 바람벽에 풀을 슥슥 묻히기만 하면 되기에 털이 부드러울 필요가 없다. 돼지털이나 말총으로 만든 억센 귀얄이야말로 제격이다.
거친 귀얄은 조선시대 도자기 장인을 만나 예술로 승화됐다. 고려청자가 쇠퇴하면서 나타난 조선 초의 분청사기는 대부분 청자의 상감기법(바탕흙을 파내고 백토로 채우는 것)이나 인화기법(도장 등으로 누른 뒤 백토로 무늬를 채움)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15세기 말 조선의 예술가들은 칼이나 도장 대신에 귀얄을 들었다. 질퍽한 백토 반죽을 귀얄에 듬뿍 찍어 회색이나 회흑색 흙으로 빚은 도자기 표면을 과감하게 둘렀다. 성긴 귀얄 자국은 그대로 빠르고 힘찬 생동감을 표현했다.
귀얄기법을 이용한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는 호암미술관에 있다가 지금은 리움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분청사기귀얄문태호다. 말 그대로 귀얄무늬가 새겨진 분청사기 큰 항아리다. 붓놀림의 속도감과 자연스럽고 자유분방한 선의 묘미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재독 작가 송현숙씨는 귀얄이 주는 질감을 캔버스에 옮겨왔다. 그는 서양의 전통적인 템페라(달걀에 안료를 섞어 만든 물감)를 귀얄에 찍은 뒤 한번의 과감한 손놀림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검은색이나 연녹색을 짙게 칠한 바탕 위에서 슥삭 움직인 귀얄의 몸짓은 시골집 마당의 바지랑대나 빨랫줄 위에 늘린 삼베 천자락, 장독대의 옹기가 됐다.
송씨는 1972년 22살의 젊은 나이에 간호사로 서독에 건너가 뒤늦게 미술 공부를 했지만, 동양적인 소재에 서양적인 표현을 가미한 독특한 작품세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작가다.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녹아 있는 송씨의 작품 40여점을 서울 학고재 화랑에서 26일까지 만날 수 있다.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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