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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기이한 시대, 부끄러운 시간을 살다 / 박수정

등록 2008-10-27 20:01

박수정 르포작가
박수정 르포작가
야!한국사회
어느 날, 공장에서 경찰이 쏟아져 나왔다. 구사대·용역깡패와 함께. 경찰이 노동자와 시민들을 폭력으로 밀어낼 땐 구사대와 용역깡패가 할 일이 없었다. 경찰이 사설 경비업체로 전락한 건 아닌지 헷갈렸다. 구사대와 용역깡패가 폭력을 행사하는 경찰을 보면서 좋아서 실실 웃는 얼굴을 맞닥뜨리니 더 그랬다. 그날 아침, 해고된 비정규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시민 몇이 공장문 안으로 끌려들어가 용역깡패한테 짓밟히고 맞았다.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이마를 다치고, 이가 부러졌다. 이들은 폭력을 규탄하고자 모였던 참이다. 구사대와 용역깡패가 폭력을 쓴 건 그날이 처음은 아니다.

하늘이 어둑해질 무렵, 한 남자가 쓰러졌다. 그냥 쓰러진 게 아니라 맞아서 쓰러졌다. 용역깡패야 노동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일당을 받는 대가로 주먹을 휘두른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는, 아니 그래서는 안 될 경찰이 시민을 쓰러뜨렸다. 누군가 구급차를 외쳤다. 다른 이도 번호를 눌렀을 텐데 순간 나도 휴대전화를 꺼내 119를 눌렀다. 위치를 전송했다는 문자가 오고, 정확한 위치를 묻는 전화가 오고, 구급차가 도착했다. 그러는 사이, 흐르는 시간은 길게 느껴졌다. 물론 그동안도 경찰은 “3보 앞으로, 5보 앞으로!”를 외치며 방패를 앞세워 공장 앞에서 골목 쪽으로 사람들을 밀어댔다. 우르르 뒤로 넘어지고 방패에 끼여 다치는 사람도 있었다. 차가 막아서 물러설 곳도 없는데 막무가내로 몰아 차 위로 사람이 떠밀려 앞유리가 깨져도 경찰은 멈추지 않았다. 회사 대표이사가 기자회견에서 공권력에 서운함을 보이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구급차는 환자한테 가지 못했다. 이동침대도 마찬가지다. 경각을 다투는 길을 경찰이 막았다. 길을 내라고 비키라고 사람들이 애원하고 소리쳐도 경찰은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사람들을 밀어댔다. 아무리 명령으로 움직이는 집단이라지만 응급환자를 두고 그럴 순 없다. 구급대원들은 이동침대를 포기하고 한 사람 들어갈 만큼만 내준 틈으로 환자한테 갔다. 바로 앞도 아니고 막아선 저 벽 끝에 내준 틈이었다. 이런 상황을 눈앞에서 보면서 경찰은 생명을 존중할 줄 모른다는 그런 말보다는 ‘미련’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절망스러웠다.

하루 뒤, 구사대·용역깡패와 경찰은 합동작전을 이어갔다. 94일 단식한 노동자와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이 오른, 비계로 쌓은 망루 둘레에 경찰과 용역깡패가 함께 매트리스를 깔았다. 검은 옷 용역깡패와 짙은 남색 옷 경찰이 손발을 맞췄다. 공장 안에 세워 둔 닭장차 ‘기대마’가 후진하다 망루를 쳤다. 망루가 휘청거리더니 기울었다. ‘망루가 쓰러졌어? 안 쓰러졌잖아. 사람이 떨어졌어? 안 떨어졌잖아’라는 듯 망설임도 없이 경찰과 구사대는 다음 작업으로 넘어갔다. 용역깡패가 “죽어봐”라고 한 말은 차라리 못 들은 체하자.

경찰병력이 늘어났다. 들어올 틈도 빠져나갈 틈도 없이 곳곳을 메웠다. 망루를 둘러싼 용역깡패 둘레에 경찰이 가 섰다. 건방진 용역깡패가 기자들을 협박했다. 경찰 간부와 회사 간부는 똑같이 무전기를 들었다. 용역깡패가 경찰인지, 경찰이 깡패인지, 회사 간부가 경찰 간부인지, 경찰 간부가 회사 간부인지. 진압 준비가 얼추 끝나자, 회사는 트로트 노래를 크게 틀었다. 조합원들은 끌려 나가 골목 끝에서 전경들에게 두 줄로 둘러싸여 감금되었다. 기륭전자 공장 앞, 사설폭력과 국가폭력이 한패가 된 이틀은 지금 우리가 기이한 시대 부끄러운 시간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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