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훈 변호사
야!한국사회
변호사인 내게, 주변 친지들이 종종 ‘최근에 옷을 벗은’ 잘나가는 변호사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매번 당혹스럽다. 전관 변호사들이 ‘통하던’ 시기는 지났으니, 그 분야 전문 변호사를 찾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평소 생각을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소송 당사자의 사법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은 만큼, 전관예우에 대한 ‘믿음’의 고집도 깊다. 더욱이 우리에게 제시되는 통계들은 평소의 내 소신을 쉽게 배반하기도 한다.
1973년에 이미 ‘전관예우’ 관행을 개선하고자 퇴직 판검사의 변호사 개업 제한을 규정한 바 있으니, 전관예우의 역사는 사법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 만큼 전관예우는 해마다 국정감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매번 되풀이되는 문제제기에 대해 법원과 검찰에서는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과거 얘기”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전관예우는” 없으며, “절차상의 작은 편의를 봐 주는 정도의 예우는 있을지 몰라도, 판결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특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명확한 근거 없이 의혹만 제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은근히 윽박지르기도 한다.
전관 선임이 실제로 판결 결과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는 일반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또한 전관 변호사의 승소율이 일반 변호사의 경우보다 높다는 통계 그 자체가 전관예우의 부당한 결과를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절차상의 편의 제공이 누적되어 승패에 영향을 주게 되고, 형사사건의 양형에 관해서는 전관의 영향이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충분히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전관예우 관행은 부당한 결과에 대한 입증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며, 문제의 본질은 그 결과 이전에 존재한다.
문제의 핵심은 전관이 판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부당한 믿음’이 여전히 확고하고, 일부 전관들이 그런 ‘부당한 믿음’에 기대어 퇴직 후 1~2년 소송을 ‘싹쓸이’하는 프리미엄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전관 변호사들은 바로 얼마 전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던 현직 판사·검사였으며, 앞으로도 많은 판검사가 ‘전관’이 되어 ‘부당한 믿음’에 응답하는 구조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부 ‘전관’이 ‘현직’의 직업적 자존과 명예를 팔아 장사를 하는 것이며, 오늘의 ‘현직’은 내일의 ‘전관’이 될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소송 당사자의 불안을 먹고 기승하는 부당한 믿음, 이 믿음에 기대어 공생하고 기생하는 전관예우의 관행은 이미 한국 사회에서 유사 종교적 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믿음의 결과 이전에 부당한 믿음의 체계가 문제이며, 따라서 부당한 믿음의 부당한 결과를 입증하라는 ‘현직’의 요구는 타당할 수 없다.
연못을 휘저어 진흙탕으로 만드는 미꾸라지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대다수의 법관과 검사들은 이 불신의 진흙탕 속에서도 묵묵히 정의의 연꽃을 길러내고 있다고 믿는다. 치명적 사법 불신의 일차 피해자는 일반 시민들이지만, 선의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다수 판검사들 역시 그 피해자일 수 있다.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이제 오래된 처방을 할 때다. 퇴직한 때로부터 일정 기간 근무지 관할 형사사건의 수임을 제한함으로써, ‘부당한 믿음’에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그것이다. 판검사들의 직업적 명예와 자존, 그리고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회복할 수 있는,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길이다.
정정훈 변호사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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