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정 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예술은 필시 위대하지만, 그것이 난공불락의 현실 앞에 뽑아들 진검이란 가히 신통한 것이 못 된다. 그것이 선동하는 윤리적 책무 또한 이목을 사로잡기엔 나약하다. 역설적이게도 정치적 고민이 진중하게 배어나는 예술일수록 보는 이의 회의감도 짙다. 이런저런 이유로 예술은 입장객 동원에 성공한 초대형 전시, 최고가 거래 기록을 경신한 작품 등 어떤 유의미한 ‘수치’를 제시하거나, 예술인의 불명예스런 추문을 전달하는 순간만 여론을 지배한다. 그렇지만 초저속으로 현안을 전파하는 예술가의 긴 계보는 여전히 아름답다. ‘여성의 집’(Womanhouse)은 고작 무명의 여학생들이 주축이 된 전시회였지만, 여성주의 미술 프로그램을 실험한 기념비적 사건으로 서구 현대미술사는 평가한다. 전시가 있던 1972년 전후로 예술적 실천 속에 여성주의가 가동한 시점으로 파악할 정도이니.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현대적 여성주의 미술의 태동을 민주화 운동과 함께 1980년대 중후반께로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이 운동의 대모 격 되는 윤석남 선생 개인전이 그제 폐막했다. 선생의 이름 옆에는 늘 여성주의가 달라붙었고, 여성주의를 포괄하는 모든 행사엔 선생의 자리가 마련될 만큼 윤석남 선생이 차지하는 상징적 지평은 넓다. 이는 비단 최고령자에게 취하는 이 사회의 관행적 예우를 넘어서는 어떤 면모가 있어서다. ‘모던 보이’였던 부친, 고등교육까지 받다 학업을 포기한 사정, 범속한 주부로 살다 제도권 미술교육의 수혜 없이 화단으로 진출해 당시만 해도 낯선 ‘여성주의 미술’을 오늘까지 지속하는 뚝심 등. 이런 각별한 개인사는 미술사가나 비평가에겐 뿌리칠 수 없이 솔깃한 드라마다. 이는 대학 중퇴, 주부의 삶에서 나이 마흔에 <나목>으로 나와 문단에 회오리를 일으킨 박완서 선생과 유사한 지점이다.
한 평론가는 여성주의 미술을 제2차 대전 후 가장 광범위한 미술운동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주의 미술의 위상과 정치적 올바름에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평소 내 ‘비평적 관심’을 사로잡진 못했는데 비단 남성 비평가의 속 좁은 거리두기로 풀이하기엔 다른 사정이 있어 보인다. 서구 화단에서조차 여성주의 꼬리표가 작품 전체를 구속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여성 예술인이 자진해서 여성주의를 부인하는 예가 적지 않다. 또 여성주의가 이미 낡은 구호라는 인상, 일부 작품에서 보이는 부박한 직설화법, 관련 주제 전시회장에 언제나 장사진을 치며 모이는 낯익은 여성 동지들의 행보 등이 공감의 폭을 제한한 불가피한 요인이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윤 선생의 근작 전시를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됐다. 조선시대 여성상·자궁·어머니처럼 ‘윤석남 대표 아이콘’들을 전시장 내 ‘윤석남의 방’이란 작은 자료실로 한정시켰다. 대부분의 공간은 유기동물 진혼을 위해 쓰였는데, 포천 유기동물 보호소 ‘애신의 집’(운영자 이애신 할머님의 성함을 딴)의 천 마리 넘는 유기동물을 나무로 제작한 것이다. 성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범생태적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하여 이를 두고 에코페미니즘이라 평하기도 하는 듯하다. 명칭이야 어떻건 여성주의의 대표 슬로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의 지평 연장은 아름답고 또한 자애로웠다. 또 이것은 한 사회가 방기한 거대한 책무가 두 분의 칠순 여성에게 전가된 불행한 장면을 보여준 점에서 우회적인 폭로전이기도 했다.
포천 애신의 집과 대학로(아르코미술관) 윤석남의 방 사이를 잇는 연대감. 여성주의 진영에서 얘기하는 자매애란 바로 이런 것이런가.
반이정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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