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유레카
저유가와 낮은 국제금리, 낮은 원화가치(엔강세) 등 이른바 ‘3저 현상’에 따른 호황과 민주화가 겹친 1980년대 후반은 한국 경제사의 황금기였다. 87~91년 사이 실질 경제성장률은 10%를 넘나들었다. 소득분배도 개선돼,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인 노동소득 분배율이 86년 52.7%에서 91년 58.8%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도시 근로자 가구의 실질 경상소득은 연평균 11.3%씩 늘었다.
85년부터 수출이 폭증한 게 호황을 이끌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교섭력이 커져 가계소득이 크게 는 것이 내수를 살려 경기의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물론 새도시 건설로 상징되는 건설투자 확대도 성장에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때의 주택공급 증가가 91년 이후 주택가격 안정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중산층’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 게 이 무렵이었다.
출생아 수에도 대반전이 일어났다. 70년대 초 연간 100만명에서 87년 62만명까지 줄어든 출생아 수가 다시 늘기 시작해, 91~95년에는 70만명대를 유지했다. 문제는 출생 성비(여아 100명당 남자아이 수)였다. 출생 성비는 80~84년 107에서 85~89년 111로, 90~94년에는 114.6까지 치솟았다. 경제적 여유를 등에 업고 사람들이 출산을 늘리는 동안, 선택 출산이 횡행했다.
출산붐이 끝난 뒤 출생아 수와 함께 출생 성비도 다시 낮아졌다. 2007년에는 106.1로 정상 수준에 다가섰다. 보건복지부는 내년부터 28주 이상인 태아에 대한 성 감별과 고지를 허용하기로 했다. 태아 성감별을 금지하는 의료법 조항은 87년 말부터 시행됐지만 선택 출산을 막는 데는 힘을 쓰지 못했으니, 이번 법 개정 영향도 크지는 않을 것이다. 정작 큰 걱정거리는 경기후퇴와 소득격차 확대로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이 더 낮아지는 것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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