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논설위원
유레카
텔레비전 사극 등에서 임금에게 신하들이 ‘만세’가 아니라 ‘천세’를 부르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만년을 살라고 기원하는 것(만세)이나 천년을 살라고 축원하는 것(천세)이나 모두 군주의 영생을 희망하는 말이다. 그러나 대한제국 이전의 왕조시대에는 각 말의 쓰임새가 달랐다. 만세는 중국의 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제후국의 왕이나 황제의 태자 등에게는 천세라는 용어가 할당됐다.
황제나 왕 이외의 실력자는 자신만의 용어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명나라 말기 천계제 때의 환관이던 위충현이 사용했던 ‘구천세’가 대표적이다. 그는 정치를 등한히하던 황제를 대신해서 국정을 농단했다. 자신에게 비판적이던 정통 유학자 그룹인 동림당을 탄압하는 등 공포 정치를 폈으며, 자신의 생사당을 짓게 하는 등 우상화 작업도 벌였다. 허수아비일망정 황제가 있었기에 ‘만세’를 차마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관민들이 자기를 만나면 ‘구천세’를 외치도록 했다.
이명박 정권의 최고 실세인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지난 설날 백두산에 올라 일출을 보면서 “이명박 만세”를 외쳤다. 날씨가 좋지 않아 백두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해가 뜨자 감격에 겨워 이같이 소리쳤다고 한다. 자연에 대한 감탄을 이렇게 표현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만세를 기원받은 이 대통령은 라이벌인 박근혜 전대표에게는 ‘이백세’를 갈구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주 청와대에서 열린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박 전대표의 생일 케이크에 꽂힌 촛불 두 개를 가리키면서 “200살까지 살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웃자고 한 농담이었지만, 이날 만남 뒤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만세와 이백세의 간격만큼이나 냉랭하다. ‘만세 이재오’가 귀국한 뒤 여권의 모습이 그려진다고 하면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일까?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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