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 에세이스트
야!한국사회
서울 반포에는 3호선과 7호선이 지나는 고속터미널역이 있다. 이곳은 어떤 이에게는 단순한 출근길이고, 어떤 이에게는 타 지역과 서울을 오갈 때 이용하는 장소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신세계백화점이나 영풍문고, 영화관 씨너스와 연결되는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아가씨들에게는 철마다 한두 벌이라도 새 옷을 장만하고 돈 3만원을 들고 가서 실컷 낭비할 수 있는 꿈같은 장소다. 그도 그럴 것이, 패스트패션이라고 욕을 먹을지라도 서울에서 3천원이나 5천원에 귀여운 티셔츠나 스커트를, 만원짜리 한두 장에 그럴듯한 원피스나 재킷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이곳은 그렇다. 한쪽 끝에서 한쪽 끝까지 걸어서 한참이나 걸리는 이 지하상가에서, 지하철역을 등지고 오른편에는 우아한 부인들이 계절에 따라 집안을 꾸밀 가구나 장식품·생화를 보지만, 왼편에는 나 같은 아가씨들이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을 하고 무심하게 쌓여 있는 옷더미 안에서 보물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이곳의 쇼윈도에는 예쁘장한 디스플레이와 어울리지 않는 “한나라당 해체하라” 등의 과격한 구호가 나붙은 지 오래고, 상인들은 종종 항의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가게 문을 닫는다. 언니 이거 대고 거울 한번 봐봐, 하던 그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점점 짙다. 서울시가 지하도 상가의 운영권을 경쟁 입찰 방식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서울시는 1998년 제정된 서울특별시 지하도 상가 조례를 근거로 법적인 문제가 없다며 공개입찰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상인들은 반발하고 있다. 오랜 기간 고생해 상권을 이루어 놓으니 관에서 그 권리를 송두리째 빼앗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시에서 보기에 이런 주장은 ‘소수의 기득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나의 입장은? 그냥 앉아서 가슴 졸이는 수밖에 없다. 일반 경쟁 입찰을 한다면 내가 동전까지 털어서 티셔츠를 사던 가게들은 그 입찰을 따낼 수 있을까. 오랫동안 시렸던 마음을 일시에 살랑거리게 해주었던 시폰 원피스를 팔면서 꼭 가면서 커피 한 캔 사 마시라고 천원씩 깎아 주던 아줌마들은 그 사업권을 따낼 수 있을 만큼 그동안 돈 많이 벌어 두었을까. 경쟁이라고 하면 역시 더 큰돈 제시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원칙일 텐데, 과연 그 가게들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동대문 패션상가도 정가제를 채택하고 있는 요즘 세상에 여기까지 없어지면 도대체 나는 어디서 옷을 사면 좋단 말인가. 요즘 정부의 기조인 듯한 ‘누가 너보고 돈 없으라고 했느냐’고 묻는다면 못살아서 죄송하게 됐다는 말밖에 할 말 없지만, 아마 백화점에 좀처럼 갈 수 없는 형편의, 그래서 강남지하상가를 사랑했던 아가씨들의 심정은 죄다 비슷할 것이다. 혹시 없어지면, 그러면 이제 난 뭐 입어.
법대로 하겠다는데, 이게 옳다는데, 자율적으로 사업자를 선정하는 게 맞다는데 뭘 안다고 거기 말을 보태겠냐마는, 적어도 근심스러워하는 것만은 내 자유다. 그냥 거기는 그런 장소였다. 어떤 아가씨들이 점심값 아껴서 알량한 주머니를 털어 오천원짜리 스커트 한 장 사고 가슴 두근거리며 여전히 강퍅할 내일 하루도 살아내려고 마음 설레었던 곳, 샤넬이고 루이뷔통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어떤 아가씨들이 만원짜리 두어 장으로 양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사치해 봤던 곳,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는 애잔한 기억으로만 남을지 모르는 곳. 그냥 주머니 가벼운 아가씨들이, 그런 사치는 좀 계속할 수 있으면 하고 소망하는 것도 가난뱅이 된장녀의 허영심일까.
김현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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