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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가슴팍에 꽂힌 판결문 / 정정훈

등록 2009-03-04 18:55수정 2009-03-04 19:14

정정훈 변호사
정정훈 변호사
야!한국사회
영화 <복수는 나의 것>(2002·박찬욱)의 마지막 장면. 송강호(동진)는 잔인한 방법으로 딸의 복수를 감행한다.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그 역시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내들한테 무자비하게 살해당한다. 사내들은 기계적으로 살인을 ‘집행’하고는, 주머니에서 판결문을 꺼내 송강호의 가슴팍에 칼로 꽂아 부착시킨다. 사내들은 손을 털고 사라지고, 송강호는 가슴팍에 꽂힌 판결문을 읽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며 죽어간다.

영화의 결말은 상징적이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반복의 끝에 판결문이 집행된다. 형법이 개인의 사적인 복수를 문명화한 것이라는 설명과도 부합한다. 그렇다면 판결문의 집행으로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사적 복수가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깨진 것일까?

며칠 전의 일이다. 변론한 형사 사건의 판결문을 읽다가 답답함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판결문에는 피고인이 주장한 쟁점에 대한 판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검사의 공소사실을 옮겨 적고는 법조문을 근거로 유죄를 선언하는 형식이다. 판결문을 읽어서는 법관이 피고인의 주장을 배척한 이유를 알 방법이 없다. 정말 답답한 것은 유죄라는 결론이 아니라, 결론의 근거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판사는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 당사자를 설득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고, 변호인으로서는 판결의 정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 결국 항소장을 냈다.

영화 속 가슴팍에 꽂혀 ‘읽을 수 없는 판결문’은 ‘읽어도 알 수 없는 판결문’의 알레고리다. 판결문은 집행력이라는 힘을 갖는다. 판결의 힘은 최종적으로는 ‘법의 힘’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 이전에 당사자를 설득하는 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를 두고 미국의 마셜 대법관은 “법학자는 진리를 추구하지만, 법률가는 설득력에 관심을 둔다”고 표현한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위 판결의 경우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삼단논법이라는 법적 논증 과정 뒤에서 판단자인 자신의 의견과 근거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방식의 판결이 예외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일부 사건은 이유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 판결이 법과 관행으로 정당화돼 있기도 하다. “이 사건 신청은 이유 없어 제1심 결정이 정당”하다는 결정의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 1심 결정을 들춰봐도 법조문만 풀어서 나열된 경우가 흔하다. 신속한 결정의 필요성을 내세워, 당사자를 전혀 설득하려 하지 않는 판단 방식이 정당한 것인지도 다시 숙고할 필요가 있다.

평론가 김현은 권위주의가 ‘동어반복’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설명한 바 있다. 내가 가진 권위와 힘이 타인에게 설명되고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오만함이야말로 동어반복의 출발이다. ‘법은 법이다.’ ‘법이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말하는 방식은 폐쇄적인 동어반복의 전형이다. 판결이 무오류의 논리일 수 없다면, 법관은 문제에 대한 고뇌와 판단, 그 근거 모두를 법적 논증 과정에서 드러내야 한다. 법관이 판단에까지 이른 생각의 경로를 온전히 드러내야만, 판결이 의미 있는 사회적 대화의 장에 개방될 수 있다. 법의 논리는 치밀해야겠지만, 법리라는 전문가의 언어만으로 당사자들을 설득할 수는 없다. 판결은 조금 더 친절해질 필요가 있다. 판결은 상식과 법 사이의 긴장과 화해를 기록하는 의미 있는 공적 자산으로 다시 자리매김돼야 한다.

좋은 판결은 사회 전체를 성숙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판결이 설득의 힘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제압될 뿐이다. 그만큼 사법 ‘불신’이라는 치명적 복수도 반복될 것이다.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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