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 에세이스트
야!한국사회
학생들이 드디어 뿔이 나기 시작했다. 울산대학교에서는 학자금 대출 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행사를 벌였고, 청와대 앞에서 각 대학 학생들이 우골탑을 넘어 인골탑이 되어 버린 등록금 때문에 울면서 삭발하고 울면서 끌려갔다. 그런다고 뭐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게, 그 뉴스 보면서 마음이 더 아픈 점이다. 엠비(MB) 정부는 한 가지는 확실히 우리를 세뇌시켰으니까. 그것은 ‘소신 있는 정치’라고 쓰고, 다음과 같이 읽는다. ‘니들은 떠들어라, 우리는 안 듣겠다.’
어쨌거나 요즘의 20대 대학(원)생들, 참 난감한 세대다. 예전에는 소를 팔아서라도 대학에 보내 주는 투자를 하면 적어도 취직해서 돈이라도 벌 수 있었으니 부모가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 요만큼이라도 있는 일종의 투자였다. 그러나 솔직히 요즈음의 대학 졸업장 따위, 예전의 고등학교 졸업장 정도의 의미나 가치밖에 갖지 못한다는 것, 인력시장이라는 장사판에 내놓기에는 그다지 매력적인 카드가 아니라는 것을 사실 우리는 다 알고 있으며 그렇지만 당장 어쩔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모른 체한다. 그러므로 최근 대학 혹은 대학원까지 보내 주는 부모의 노력은 ‘투자’가 아니라 ‘자선’이라 보는 것이 마땅하다. 결코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못하고 한없이 주어야 하는, 말 그대로의 희생. 그러므로 돌려줄 수 없어 부모에게 미안하고, 그렇다고 해서 안 받기에는 주변 애들도 다 받으니 나도 안 받을 수 없고, 만성적 실업과 불황이 순식간에 좋아질 리 없으니 제 자식에게 제 부모가 해 준 그대로 해 줄 수도 없을 세대가 지금의 20대 대학(원)생들이다. 어른들은 흔히 대학생들은 낭만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애들은 영악하고 약아빠졌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당장 굶어죽게 생겼는데 어쩌란 말인가. 부자 아빠가 아니라 그냥 아빠 혹은 가난한 아빠의 자식들에게 대학생활은 낭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대학은 더 깊은 학문을 탐구하기 위한 배움의 장이 아니라 월 10만원이라도 더 높은 연봉을 얻기 위해 넘어야 할 4년간의 허들일 뿐이다.
적어도 내가 그러했다. 국립대라는 데도 등록금 벌다 보면 하루가 꼬박 갔다. 그나마 지금은 그것도 허용되지 않게 규정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카드로 등록금 납입이 가능했다. 친척 카드를 빌려서 등록금을 최대 개월의 할부로 결제하면 한 달에 사십오만원씩 갚아 나가야 했다. 사십오만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냥 벌 수 있는 간단한 돈인지 모르겠으나 별 가진 재주 없고 술집 나갈 외모도 각오도 안 되는 스물한두 살짜리 여자애가 벌어 대려면 별짓을 다 해야 했다. 내 대학시절에는 요만큼의 낭만도 없었고, 요만큼도 즐겁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매달 갚아야 했던 그 사십오만원의 엄정한 기억뿐이다. 그들은 결코 기다려주거나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게 금융이라는 거니까.
하지만 금융은 몰라도 사회라는 곳은 애들을 조금 기다려줘야 하는 게 아닐까. 부자 아빠 자식이 아니라도 아직 새파란 청춘일 때는 하고 싶은 공부도 좀 하고 읽고 싶은 책도 좀 읽고 동아리 활동도 좀 하고 술 먹고 길에 나자빠져 독한 연애도 하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글을 쓰는 동안에도 대학원 휴학생인 나에게는 쌀쌀맞은 전화가 걸려오고, 굽실대며 받는다. 고객님, 이번 달도 학자금 대출 이자 납입 늦으셨거든요? 네, 제가 이번 달에 좀, 네, 네, 꼭 입금하겠습니다, 네, 네, 죄송합니다. 누가 공짜로 공부시켜 달라고 했나, 다만 덜 죄송하면서 공부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