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정 르포작가
야!한국사회
얼마 전 경남 고성 두호마을에 사는 여성 농민 김덕윤씨를 만났다. 늦은 밤 도착해 보니, 작은 대문이 활짝 열렸다. 대문도, 마루문도, 방문도 안 잠그고 잠든 밤이었다. 가진 것도 없는데 늘 걸어 잠그고 산 나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바깥문들은 놔둬도 방문은 잠그자고 일어났다. 미닫이문 고리가 헛돌았다. 늘 이렇게 열고 사는구나 싶으니 마음이 편했다. 오랜 세월 공동체를 이루어온 마을이고 사람들이었다.
이른 아침, 새벽에 들로 나갔던 김덕윤씨 남편이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들국화 한 다발이 실렸다. 풀어서 아내 품에 안기진 않았지만 남편은 마당에서 수줍은 듯 선물이라 했다. 아내는 부엌에서 “꽃? 무슨 일이래요?” 하는데 살짝 설렜다. 36년을 함께 살면서 처음 주고받은 꽃이었다.
많은 농민이 그렇듯 이들 부부도 땅 한 뙈기 없이 농사를 시작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남편은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농사는 아내가 맡았다. 겨울에도 오토바이로 새벽바람을 맞으며 도시로 일 다닌 남편이 안쓰러워 한동안 월급봉투를 버리지 못했다. 일 년치씩 묶어 십 년간 월급봉투를 모았단다. 그이에겐 단순한 종이봉투가 아니었다. 짧은 농사일지를 함께 적은 가계부를 꼬박꼬박 써서 20년치를 보자기로 묶어놓기도 했다. 줄이고 아껴가며 그야말로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조금씩 논을 사고 밭을 사고 소를 샀다. 그렇다고 아주 넓은 땅도, 여러 마리도 아니다. 지금은 어미 소와 한 달 된 송아지 한 마리가 있다. 이웃들도 엇비슷한 살림이다.
어려서부터 치면 50년 가까이 일해 신물날 텐데, 그이는 농사짓는 거나 촌에 사는 게 싫다고 생각한 적이 없단다. “숨궈 놓으면 싹 나는 것도 귀엽고, 열매 나는 것을 보면 보람 있다”고 한다. 그이를 따라 고추, 가지, 깨, 콩, 감자, 고구마, 돌가지(도라지), 호박, 토종 옥수수 들을 심고 뿌린 밭을 돌아보았다. 심은 것이든 절로 자라는 약초든 이름 하나씩 다 불러주고 언제 무슨 일을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자식 키우는 것과 같다.
물론 한국 사회 농업정책은 이런 소박한 생각을 비웃듯 60년대부터 지금까지 농업을 살리기보다는 그 반대 길을 걸었다. 그래 살농정책이라 하잖는가. 80년대 초반, “농촌이 소외받고 부당하게 대우받는 현실”에 눈을 뜬 그이는 농사만큼이나 농민운동도 열심히 해왔다. “농민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정책”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요구했다. 소몰이 시위, 수세폐지 투쟁, 의료보험제도 시정 투쟁,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 자유무역협정 반대 투쟁 등 안 해 본 게 없다. 마을 들머리까지 와서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맞서고, 때마다 서울로 가 아스팔트 농사도 숱하게 지었다. 혈서도 쓰고, 삭발도 했다. 여의도에서 전경들이 내리찍는 방패에 머리가 찢기고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나가기도 했다. 가방으로 머리를 막지 않았다면 자신도 경찰 폭력으로 죽은 두 농민이 되었을 거라 한다. 그래도 그 두려움을 피하지 않는다.
투쟁한다고 세상이 확 바뀌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씩, 10년을 외쳐야 하나씩 바뀌었다. 더딤과 기다림에 지쳐 그만두는 사람도 있지만 그이는 첫 마음을 아직 내려두지 않았다. 어느 자리든 가야 하면 새벽까지 일을 해두고 살림을 챙겨 두고 집을 나선다. 크게 모이는 자리만이 아니라, 마을에서부터 시작하자 싶어 여성농민회 분회도 만들었다. 올 1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을 마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다. “대통령이면 가난한 사람을 두루 살펴야” 하는데 농민·노동자·철거민은 아예 외면하는 이때, 그이가 싸워온 시절을 다시 시작해야 하나보다.
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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