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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노무현이 가장 행복했던 때 / 남종영

등록 2009-05-26 20:22

남종영 사회정책팀 기자
남종영 사회정책팀 기자
한겨레프리즘
“저, 거기 ○○경찰서죠? 저 시민인데요, 촛불집회 어디서 하나요? … 뭐라고요? 덕수궁 대한문 앞에 있다고요? 청계 광장에서 벌써 거기로 갔어요?”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한 기업의 노조 간부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촛불집회에 가겠다며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재밌게도 경찰은 시위대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었다. 그는 저번에도 이렇게 촛불집회를 찾아갔다며 “시민이 집회에 가겠다는데, 경찰이 관련 정보를 알려주는 게 민원 서비스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경찰에 전화를 거는 그의 역발상 때문에 즐거웠고, 그의 역발상을 받아주는 경찰의 넉넉함도 흐뭇했다. 그날 우리는 유쾌했다.

그리고 며칠 안 되어서였던 것 같다. 부산의 처갓집에 내려갔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러 가자고 해서 김해의 봉하마을로 향했다. 그때는 노 전 대통령의 인기가 절정인 즈음이라 마을 어귀에서부터 교통 정체가 벌어졌고, 사람들은 차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환영한다’는 김해 노래연습장협회의 현수막을 지나, ‘노간지’가 담배를 샀다는 슈퍼마켓에서 음료수를 사고, 그의 생가에 들르는 순서로 ‘성지순례’를 이어갔다. 마을 광장에는 대통령이 관광객 앞에 나타나는 ‘출연 시간표’가 적혀 있었다. 출연 시간표에 맞춰 마침내 그가 집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자, 수백명이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제가 지금 서커스에 나오는 동물 신세라니까요. 평일은 서너 번이면 되는데, 주말에는 이렇게 많이들 오셔서 예닐곱 번은 나와야 돼요.”

관광객 중 한 사람이 “대통령님! 사진 찍을게요”라고 소리치더니, 두 팔을 올려 머리에 대고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노 전 대통령도 그를 따라 하트를 그렸다. 찰칵찰칵. 휴대전화 카메라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대통령 할 적엔 욕하더니, 놀고 있으니까 좋다고들 하네요.”

사람들은 그저 대통령을 가까이 보는 게 신기했고, 대통령도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는 게 흐뭇한 듯했다. 사람들은 정말로 중구난방 말을 걸었고, 대통령은 일일이 대답했다. 물론 시시껄렁한 질문과 실속 없는 답변의 연속이었다. 하트를 대여섯 번 만들고 나서야 대통령은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날 그의 홈페이지에는 진행요원들이 찍은 관광객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대통령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우리 가족 사진도 눈에 띄었다. 참 넉넉한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그때만 해도 부엉이바위가 그렇게 높은 줄 몰랐지만.

노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이유는 그저 텔레비전에 나오던 이가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적자생존의 정글에서 기어코 살아남은 동류의 비주류 정치인이, 종국에는 파멸을 선택하는 걸 보고 느꼈을 정체 모를 좌절감 때문일지 모른다.


지난해 봄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너무 막강해서 역설적으로 힘든 권좌에서 내려왔으니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그때만 해도 우리는 농지거리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유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경제위기를 맞았고, 욕망은 벌거벗은 채 질주했고,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반성적 사유는 귀퉁이로 내몰렸다. 언제부턴가 정부는 촛불집회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뭔가를 말하려면 경찰버스가 달려와 차벽을 세웠다. 노 전 대통령이 황망히 떠난 지금, 서울시청 앞을 내려다보면 광장은 경찰버스에 막혀 텅 비었고 분향객들은 귀퉁이에 개미처럼 몰려 있다. 기괴한 풍경이다. 안타깝게도 일년 만에 바뀐 우리의 자화상이다.

남종영 사회정책팀 기자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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