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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날지 못하는 새들 / 남종영

등록 2009-07-28 22:10

남종영 사회정책팀 기자
남종영 사회정책팀 기자
열흘 동안 남극에서 펭귄들과 논 적이 있다. 지구 온난화 취재차 남극 킹조지섬의 세종기지에 머물렀는데, 사실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끝없는 얼음 벌판 위에 조그만 과학기지 하나, 거기서 365일을 보내는 연구원 몇 명. 시간은 홍수처럼 차고 넘쳤다. 그때 하던 일이 ‘펭귄 마을’ 산책이었다. 바턴반도 절벽 근처엔 8000여 마리가 모여 사는 펭귄 서식지가 있는데, 거기까지 2㎞를 아침저녁으로 걸어갔다 오는 것이었다.

맨 처음 펭귄을 봤을 땐 너무 신기해서 다섯 살배기 조카랑 공원에서 술래잡기하듯 쫓아다녔다. 하지만 펭귄이 신기하지 않아졌을 즈음, 펭귄 무리 옆에 그냥 앉아 빙산이 떠다니는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그런데 펭귄들이 아장아장 다가오는 것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한두 발짝 다가왔다가, 눈이 마주치면 뒤뚱뒤뚱 줄행랑을 쳤다. 그렇게 펭귄과 노는 법을 터득했다. 가만히 있으면 됐다. 내겐 그들을 해칠 의도가 없었고, 그들도 나를 겁낼 이유가 없었다.

아프리카 모리셔스섬에 살던 도도새들도 사람을 겁내지 않았다. 도도는 700만년 전부터 이 섬에 살았다. 인도 대륙의 비둘기 한 마리가 비행 도중 거대한 폭풍에 휩쓸려 1만㎞ 이상 떨어진 섬에 착륙한 것이다. 섬은 평화로웠다. 비둘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상위 포식자가 넘치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아니었다. 도도는 날지 않아도 됐다. 날개와 날개를 움직이는 가슴근육은 퇴화했다.

포르투갈 선원들이 섬에 도착한 건 1507년이었다. 선원들에게 도도는 이상한 새였다. 대륙의 새와는 달리 아주 온순했고,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사람에게 다가왔다. 700만년 동안 도도의 조상들은 단 한 번도 포식자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슬프게도 그 신뢰가 문제였다. 불운한 도도들은 인도양의 외딴섬에 차례로 상륙한 이국의 선원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죽었다. ‘고기 맛이 없다’면서도 그들은 도도를 때려죽였다. 포식자에 대한 회피 본능이 미토콘드리아에 각인되기도 전에 도도는 200년 지나 멸종했다.

“여기서 일한 게 몇 년인데, 한순간에 해고당할 줄은 몰랐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계속 일할 수 있을 거라고 했고….”

얼마 전 <한국방송>으로부터 계약해지 통보를 받은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동료들은 “정규직이 될 수 있으니 열심히 일하라”고 어깨를 토닥였고, 그는 믿었다고 했다. ‘일자리가 희망입니다’라는 특집방송을 하는 공영방송이 자신을 해고할 줄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 생태계의 강자 논리 앞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가 더는 강하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당황했을 것이다. 당황은 절망과 공포를 거쳐 분노로 발전한다.

지금 쌍용자동차 도장공장에 남아 새총을 쏘는 600여명의 해고자들도 맨 처음 전체 사원의 3분의 1인 2646명의 구조조정이 시행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뇌리를 스친 것은 ‘설마…’였을지 모른다. 평화적인 촛불시위가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올해 초 용산참사가 일어나던 날 밤 처음 투석전이 전개됐을 때, 한 사람은 이렇게 외쳤다.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평화시위를 하잔 말이오?”

도도나 펭귄과 달리 약육강식의 자연에 오래 노출된 새들은 날갯짓을 할 줄 안다. 그래야 몇 발짝이나마 뛰어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부리로 쪼며 공격도 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도도처럼 멸종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건 슬픈 사실이다. 날개 없는 새들이 약육강식의 논리에 스스로 식민화되는 건.

남종영 사회정책팀 기자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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