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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칼럼] 이제 받아들여야 하는가

등록 2009-08-11 20:31

곽병찬 편집인
곽병찬 편집인
얼마 만인가. 엊그제 와이에스가 디제이를 병실로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화해할 때가 됐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불과 두 달 전 그는 이런 독설을 퍼부었다. 디제이가 독재의 극복을 역설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했을 때였다. “디제이가 스스로 입을 닫지 않으면 국민이 그의 입을 막아버릴 것”이라고.

한때 민주화의 쌍두마차였지만, 와이에스는 언젠가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그를 매장하려던 이들보다 더 디제이를 미워했다. ‘수구 꼴통’을 그렇게 경멸했던 그가 수구 꼴통과 길을 함께 갔던 것은 그런 미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기 전 그가 디제이와 화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들 봤다.

하지만 그의 변화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하나를 인정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로만 받아들여졌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병문안했으니 그 신호는 더 강했다. 상태가 얼마나 위중하면 그들이 화해를 말하고 쾌유를 빌까. 와이에스를 맞던 디제이의 부인 이희호씨는 차가워지는 남편의 손을 걱정하며 벙어리장갑을 짜고 있었다. 이들 모두 다가오는 무언가를 두려움 속에서 보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시인 군나르 로알드크밤의 시 <마지막 한 방울>이 떠오른 건 이런 까닭이었다. ‘마지막’이란 말의 연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디제이의 노벨상 수상식에서 군나르 베르예 노벨상위원회 위원장이 인용했던 것이 바로 그 시였다. 와이에스를 포함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꿈꾸던 이들 모두가 지금쯤 함께 읊조리며 첫 방울의 초심을 돌아봐야 할 때라는 생각도 작용했을 게다. “옛날 옛적/ 물 두 방울이 있었네/ 하나는 첫 방울/ 다른 것은 마지막 방울/ 첫 방울은 가장 용감했네/ 나는 마지막 방울이 되도록 꿈꾸었지/ 만사를 뛰어넘어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되찾는 그 방울을/ 그렇다면/ 누가/ 첫 방울이기를 바랄 것인가”

베르옌이 인용한 ‘첫 방울은 가장 용감했네’는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 평화와 화해협력을 위해 평생을 바친 디제이에게 주는 가장 적절한 헌사였다. 첫사랑이 그렇듯이 어떤 시작이건 물방울처럼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기 마련. 그러나 바로 그 흔적으로 말미암아, 더 고귀한 가치와 꿈을 향한 행진은 이어지는 법.

사실 6·15 선언도 콘크리트 장벽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물방울은 아니었다. 그가 시작했던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의 제도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철옹성 같은 냉전세력의 맹목성, 자본의 탐욕, 언론의 선동 앞에서, 이런 노력은 지금 물방울처럼 연약하기만 하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노력을 무효화하고 있고, 평화를 위한 화해협력을 냉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나아가 정치보복의 괴물을 부활시켜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속에서 디제이는 오열하며 자신의 몸이 허물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80년 신군부의 사형선고 앞에서도 ‘결코 정치보복은 하지 말라’고 동지들에게 당부했던 그였다.

디제이는 두 달 전, 29년 전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에서 했던 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민주세력의 단합을 호소했다. 그 호소는 하나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객은 500만에 이르렀다. 첫 방울의 시도는 결코 무모하지 않았다.

지금 잎새를 흔드는 바람에도 마음은 소스라친다.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 그러나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모진 풍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했던 거목의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 안주할 순 없다. 그리고 그가 첫 방울이 되어 깨뜨리고자 했던 저 장벽을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이루는 마지막 물방울이 되기를 다짐해야 한다.


곽병찬 편집인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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