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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과경제] 무지막지한 만용 / 유철규

등록 2009-08-12 20:18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경제학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경제학
‘무지막지한 만용’.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만약 9월 정기국회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안마저 통과된다면, 5월에 날치기 따위의 온갖 추잡한 오명을 덮어쓰면서 통과된 은행법과 함께 금융과 재벌간 분리 규칙(금산 분리 규칙)을 어렵게 지탱해 온 주요 법적 장치들이 대부분 무너지는 셈이다. 위기 때마다 재벌과 은행의 공도동망이라는 최악의 재앙을 그나마 막아주었던 안전핀이 뽑히는 것이다. 상호 견제해야 할 산업과 금융을 통합된 경영에 맡기는 실험이며 또 재벌의 평생소원을 성사시켜주는 일이기도 하다.

언론에 따르면 대통령은 자주 “잘사는 사람과 대기업에는 내가 필요 없다. 그 사람들에게는 정부가 간섭 안 하는 것이 제일 잘해주는 거다”라고 말하곤 했다. 정부와 여당이 이 말을 액면대로 따르는 것이라면, 그래서 불법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간섭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이 불편해할 만한 법 자체를 알아서 없애주는 것이라면 우려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혹자는 잘하는 직원을 신뢰하고 그에게 불편한 점이 있다면 알아서 없애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최고경영자의 덕목이 아니냐, 지금 한국 주식회사에서 가장 잘하는 직원은 재벌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일리 있는 말이다. 우리가 대통령이 아닌 최고경영자를 뽑은 것이라면 그렇다. 그러나 최고경영자라 하더라도 ‘알아서 잘해보라’ 식의 묻지마 몰아주기는 회사에 엄청난 위험을 초래한다.

1989년 광주은행이 한 외환딜러의 환투기로 350억원을 날린 적이 있다. 그전 몇 년간 이 직원은 30억원씩 벌며 때로는 은행 당기순이익의 80%까지 벌어들인 적도 있어서 가장 잘하는 직원으로서 묻지마 신뢰를 받았다. 1995년에 수협의 한 과장이 170억원가량 손실을 입혔는데, 이때도 2, 3년간 환투기 이익을 보아 회사의 보배라 했다. 시야를 넓히면, 1995년 영국 베어링은행 사태가 있다. 외환과 주식 파생상품을 담당했던 한 직원이 일으킨 손실이 234년 역사의 은행을 파산시켰다. 가까이는 2008년에 한 선물 담당 트레이더가 프랑스 2위 은행 소시에테 제네랄에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입은 손실보다 무려 2.5배에 달하는 71억달러의 기록적인 손실을 입혀 은행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 널리 알려진 대로 미국 최대 보험사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AIG)을 파산위기로 몰아간 주범은 직원 규모가 수십분의 일에 불과한 금융파생상품사업부(AIG 파이낸셜프로덕트)였다. 물론 그전까지 이 사업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대접을 받았다. 경영진과 이사회가 일의 과정과 위험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밀어주는 일은 반드시 언젠가는 회사를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위험관리와 필요한 감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낙후되었느냐 선진적이냐의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밀어붙이기식 금산분리 완화 정책을 우려하는 이유는 그 어디에서도 몰아주기에 따른 위험 관리나 감시·감독 장치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논의 자체가 실종되었다. 앞의 기업 사례에서 사고 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일이다. 더구나 한국은 주식회사가 아니고 대통령과 집권당은 경영자도 아니고 이사회도 아니다. 국민의 삶을 담보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금산분리 완화 정책은 현 정부가 추진하는 일 가운데 아마도 장래에 국민의 삶과 경제에 가장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일일 것 같다. 아무리 언론이 다른 데 가서 떠들고 있어도 국민이 금산분리 완화 정책에 관심을 두고 있어야 하는 이유다.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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