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만약 재무부가 낡은 몇 개의 병에 돈을 채워 그것을 폐광의 갱 속에 적당한 깊이로 묻고, 허다한 시련을 잘 이겨낸 자유방임의 원리에 입각해 개인기업에 그 돈을 다시 파내게 한다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 나오는 이 유명한 대목보다 불황에 빠진 자본주의를 구하는 케인스식 처방을 짧게 잘 설명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는 국가를 비롯한 경제주체들의 ‘낭비적인 차입지출’이 어떻게 사회를 균형 위에서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지 역설했다. 이 ‘위험한 사상’은 자유방임주의로 무장한 기득권자들을 물리치고, 풍요로운 자본주의의 한 시대를 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라고 선언했을 때 그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었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낭비적인 차입지출’은 버릇이 돼 버렸고, 자본주의는 물가 상승에 시달리고 활력 또한 잃어가고 있었다.
지난해 세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케인스가 박물관에서 나왔다. 모두가 다시 케인스주의자가 된 듯하다. 그런데 실제 작동하는 것은 그 옛날 ‘차입지출’의 ‘기술’뿐이다. 그 밑바탕에 깔린 케인스 사상의 핵심은 정작 보이지 않는다. 케인스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결함은 완전고용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점, 부와 소득의 분배가 자의적이고 불평등하는 점에 있다”고 했다.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는 바로 그 불평등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꽃을 피웠다.
올해 들어 우리나라의 빠른 경기회복에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 많다. 잘 보면 회복은 후손들에게 빌려쓴 대규모 재정지출과 가계의 부채 소비에 거의 힘입은 것이다. 외부 여건이 얼른 좋아지지 않는다면, 도리어 위태로울 수도 있는 길이다. 이번에도 엄청 운이 좋을까?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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