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정 르포작가
지난달 20일, 서울 장충체육관. 적게 잡아 여성 3000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억양은 조금씩 달라도 똑같이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이다. 예전엔 그이들을 ‘농가주부, 농촌부녀’라고 불렀단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농사와 육아·가사에 마을 일까지 몸이 부서져라 움직여도 노동하고 생산하는 주체라는 걸 사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여성농민회를 만들면서 ‘여성농민’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이부터 그이만한 손녀를 두었을 듯한 이까지, 그야말로 여성농민 생애를 한눈에 본다 싶은 날이었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20돌을 기념한 전국여성농민대회. 많은 수가 40대에서 70대였다. 농사 경력이 20년부터 해서 5, 60년은 거뜬히 된다. 어느 한 사람, 땅에서 키우는 일에 전문가 아닌 이가 없다. 전문가 좋아하는 사회지만, 책상 앞에 앉아 10년이면 전문가 행세하는 이들이 많지만, 여성농민들이 지닌 전문성엔 애써 눈길 주지 않는 사회다.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이 진짜 전문가들이 있기에 우리가 산다. 우리가 먹어야 사는 곡식과 채소, 과일, 육류가 모두 그이들 손에서 나온다. 논밭에서 땀 흘려 자기 자식을 기르고 가르쳤다지만 동시에 얼굴 모르는 무수한 우리도 그 땀에 큰 셈이다. 그러는 동안 여성농민들 다리는 휘고 허리는 굽었다. 정말이지 90도보다 더 아래로 허리가 꺾인 이들도 많았다. 차 타고 온 줄 알지만 어찌 오셨을까 싶어 한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주 여성농민이 들려준 얘기가 떠올랐다. “아가, 엄마가 논두렁 깎고 젖 주러 올 때까지 기다려.” 포대기로 아이를 나무에 묶어 놓으면 아이는 풀을 뜯어 먹고 흙을 집어 먹고, 엄마는 “순 들강아지처럼 들에 가 살았던” 날들이 어찌 당신네만을 위한 거였다고 말할까. “만날 일만 하는” 어머니를 봤던 세대가 어머니보다 훨씬 더 길게 “해가 넘어가려면 일을 해야” 했던 시간을 살았기에 오늘 우리가 있다. 언젠가 구례 여성농민이 “모를 한 줄 심고 못줄을 떼면 그 참에 허리를 좀 펴련만 두 줄을 심어야 못줄을 떼어 허리가 아팠던” 얘기 끝에 “다 그러고 살았어요. 우리만 아니라 우리 어르신들은 더 글지(그렇지). 시방 70대, 80대 어르신들이 더 애쓰셨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우리 사회는 정작 고마워해야 할 이들을 무시하진 않나 싶었다. 따져보면 “산업사회 발달을 일군” 맨 밑, 중요한 곳에 농민들이 있다.
체육관 계단을 손으로 짚으며 올라 좁고 딱딱한 의자에 앉은 여성농민들이 손에 ‘식량주권 실현!’이 적힌 작은 책자를 들었다. 눈앞에 ‘국민에게 안전한 먹을거리 보장, 생산·가공·유통을 현장의 농민에게, 씨앗을 지키는 여성농민 권리 실현, 성 평등한 농촌 실현, 이명박식 농정 반대, 쌀값 보장, 자주평등세상 실현’을 적은 펼침막이 걸렸다. 대회사에서 김경순 전여농 회장은 농업을 살리려면 “농민과 정부, 온 국민이 나서도 시간이 걸릴 판국인데, 대다수 농민을 퇴출시키고 농기업을 육성하여 식량자급이 바닥인 나라에서 수출농업 중심으로” 가려는 정부를 비판하며 근본적인 대책 수립이 시급하다고 했다.
전에 만난 순천 여성농민은 “정부가 농정을 바로했으면 젊은 사람들이 왜 떠나겠느냐”고 했다. “소농을 죽이고 대농만 살리는 정책”이 우리 미래마저 죽이는 건 아닐까. 제주 여성농민이 초등학교 텃밭 교육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농민이 꿈인 사람을 물었더니 딱 한 명이 손을 들더란다. 전문가는 책상에 있지 않다. 정부는 여성농민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여성농민이 행복한 농촌’이 우리 모두 행복할 바탕이다.
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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