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구 기자
파우스트의 입을 빌려 괴테는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고 했다. 회색은 흰색처럼 순수하지도 못하고, 검정처럼 강렬하지도 못한 색이다. 그 ‘타고 남은 재의 색깔’로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 때의 학살을 묘사한 <게르니카>를 그렸다. 물론 회색에 그런 나쁜 이미지만 있는 건 아니다. 회색은 작은 야행성 동물들이 보호색으로 가장 선호하는 겸손의 색이요, 수도사와 순례자들에게는 청빈의 색이다. 예수도 회색 옷을 입었다.
정치의 세계에서 ‘중도’는 회색이다. 어느 편인지 확실하지 않은 이들은 ‘회색분자’로 불린다. 그러나 정치적 중도에도 두 개의 얼굴이 있다. 이쪽저쪽에 떡고물을 노리고 양다리를 걸치는 기회주의적인 중도가 있고, 기존 주류들을 뛰어넘으려는 도전적인 중도가 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스스로를 자조하면서까지, 진보와 보수 주류 모두와 충돌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로 그 후자의 길을 걸었다. 토니 블레어가 이끈 영국 노동당은 정치적으로도 꽤 큰 성공을 거둔 중도의 사례다.
모든 새로운 사고는 환영받기 쉽지 않은 법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1963년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와서 “그의 극악무도한 행위는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인간이기 때문이지, 인간성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했다가 미국 유대인들의 거센 비난을 샀다. 어떤 ‘주의자’인지 따위에는 평생 관심이 없던 아렌트는 주류 학자와 유대인의 눈에 분명 ‘회색분자’였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전체주의 연구에서 창조성을 빛낸 아렌트의 회색은 얼마나 아름다운 색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6월부터 ‘중도’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아직 걸어온 길이 짧아 평가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그 길이 창조적인 중도의 길이라면, 이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자들과 먼저 싸우게 될 것이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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