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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구기동의 멧돼지 사살 / 우석훈

등록 2009-09-23 21:10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구기동과 평창동은 북한산을 끼고 있는 동네이고, 길을 건너면 북악산을 따라서 신영동과 부암동이 있다. 1970~80년대 서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고, 아직 아파트한테 먹히지 않은 드문 동네이다. 드라마 <트리플>을 비롯해 70년대 서울의 모습이나 그런 분위기가 필요할 때면 대부분 이 동네에서 촬영을 한다. 불과 20~30년 전 모습이지만, 아파트가 아닌 동네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곳이 서울에서도 몇 군데 남지 않았다.

지난 주말 이 동네에 멧돼지가 출현했다. ‘인왕산의 호랑이’가 조선시대의 모습이었다면, ‘구기동의 멧돼지’가 이 시대의 모습인 셈이다. 이게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주택가의 이물질을 제거하듯이 사살하게 되었다. 북한산만이 아니라 아차산 같은 곳에도 멧돼지가 종종 출현한다. 환경부 조사 결과를 보면, 수도권 지역의 멧돼지 서식 밀도는 100㏊당 7.5마리로 전국 평균인 3.7마리의 갑절에 달한다. 멧돼지가 주택가로 내려오는 이유는 몇 가지로 추정되는데, 일단 먹이가 부족하기도 하거니와, 주로 번식기를 맞아 영역 다툼에서 밀린 수퇘지들이 새로운 서식지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고립된 생태계에서는 서식지를 더 늘릴 수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주택가까지 내려오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가을이면 멧돼지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멧돼지를 사살해왔다. 사냥을 원하는 사람들은 멧돼지가 천적이 없는 상태에서 생태계의 최상위에 존재하므로, 수도권 지역에서도 개체수 조절을 위해서 사냥을 허락해주기를 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건 좀 어려운 말이다. 지리산에는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그 생태계가 지탱할 수 없는 야생곰도 방사하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말이다. 원래 서울은 호랑이 같은 대형 포유류도 살던 곳인데, 이제는 호랑이를 지탱할 정도의 대규모 생태계는 없고, 조각조각 잘린 도시의 생태계에서 멧돼지가 우리가 아는 대형 포유류이다. 여우가 아직도 살고 있다는 일본의 생태계는 부러울 따름이다. 일본이 한국보다 공업화를 덜했거나 산업화가 미진해서 여우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먼저 자연생태도 일종의 자산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수도권에 멧돼지가 돌아왔고 개체수가 늘고 있다는 것은 즐거운 변화이지만, 이제 멧돼지와 사람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또다른 질문을 받아들게 되었다. 멧돼지가 살 수 없도록 자연생태계에도 아파트를 들이밀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지금처럼 멧돼지가 출몰할 때마다 호들갑을 떨면서 사살하는 것,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가장 좋은 것은 광역 생태축을 복원해서 멧돼지들이 이동을 좀더 자연스럽게 하도록 하고, 그렇게 공원들이 연결되는 생태적 도시로 변화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4대강 개발로 상징되는 토건정신 앞에서 멧돼지와의 공존을 생각하며 공원들을 연결하고, 그렇게 생태축을 만들자는 것은 당분간은 도상 위에서만 가능한 상상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때마다 기이한 해외뉴스라도 보는 것처럼 멧돼지 사살을 대문짝만하게 뽑는 언론, 그것도 남우세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21세기가 자연의 시대라지만, 멧돼지를 사살하는 모습, 교육적으로도 좋지 않다. 생태전문가들로 길 잃은 야생이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 생태는 사살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할 친구이다. 멧돼지 사살, 그것이 야만이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길 잃은 멧돼지를 죽이지 않는 사회, 그게 우리가 갈 곳 아닌가?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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