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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칼럼] 시인 대통령

등록 2009-09-27 21:43

곽병찬 편집인
곽병찬 편집인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에 놀러 가”(‘산문시 1’)는 세상. 그런 세상을 신동엽 시인이 꿈꾼 것은 공교롭게도 남북간 일촉즉발의 대결국면에서였다. 북쪽은 무장간첩을 남파해 청와대 들머리에서 교전을 벌였고, 남쪽은 예비군은 물론 북파 특수부대를 창설하는 등 일전불사의 태세를 갖췄다. 이 상황에서도 시인은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칫솔 사러 나오시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시인은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아니 불가능한 것을 꿈꾸기에 시인이라 할 것이다. 이런 꿈을 통해 시인은 철옹성 같은 현실에 생채기를 내고, 오만과 편견의 바벨탑에 균열을 낸다. 그로부터 12~13년 뒤 김남주 시인도 대통령에 관한 불가능한 꿈 하나를 펼쳐보였다. 학살에 이어 연행, 고문, 투옥, 죽음이 잇따르던 시절이었다. “…아름다운 이름의 대통령 하나 갖고 싶다./ … 아름다운 추억의 대통령 하나 갖고 싶다./ … 산과 들에서 공장에서/ 조국의 하늘 아래서/ 흙 묻은 손과 땀에 젖은 노동의 손이 빚어낸/ 그런 대통령 하나”(‘대통령 하나’)

2005년 9월 중남미의 코스타리카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아벨 파체코 대통령과 회담한 뒤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시인 대통령께서 나를 시인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대통령이 끝나면 숲을 가꾸려고 했는데, 시를 쓰는 일도 해봐야겠다”며 그는 아이처럼 꿈에 부풀었다. 실제 그는 퇴임 후 신동엽 시인이 그린 것처럼 손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농로를 달리거나 촌로들과 막걸리를 나누곤 했다. 불행하게도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의 꿈을 우리 사회는 지켜주지 못했다.

다이애나와 자신을 연상시키는, 영국 왕세자비와 프랑스 대통령의 사랑을 그렸다는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의 소설이 공연한 상상을 자극한다. 전직 대통령의 윤리의식과 출판업자의 상술을 비판하는 소리도 있긴 하지만, 여든 넘은 전직 대통령이 그런 사랑을 꿈꾸고 소설로 풀어낸 것만큼은 한없이 존경스럽다. 지엄하신 대통령도 내 마음속 은밀한 욕망을 공유하고 있다니! 그걸 또 만천하에 알리다니!

시인(소설가라도 좋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이웃의 고통과 원망을 저의 고통으로 느끼고 드러내는 이들, 물이나 돌에도 생명을 불어넣고 교감할 줄 아는 이들, 그래서 세네갈의 시인 대통령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는 1979년 방한 때 이렇게 말했던가. “나는 시인인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보다는 대통령을 지낸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조순 선생이 제자인 정운찬 총리 후보에게 귀감으로 천거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시를 사랑하기로 유명하다. 2006년 영국 방문 때 “주로 무슨 일로 잠을 잘 못 이루는가”라는 기자의 물음에 시인 굴원과 정판교의 시로 답했다. “긴 한숨 쉬며 남몰래 우는 건, 고생하는 민생이 애처로운 탓이오.” “관저에 누워 대나무 소리 듣자니, 백성들 아파하는 소리 들리는 것 같아.”

비록 노 전 대통령의 꿈을 앗아간 이로 지목되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시를 꿈꿨으면 좋겠다. 시인이라면 대나무 소리에서도 민생의 고통을 느낄 것인즉, 어찌 이웃의 고통에 눈감고, 그들의 눈물을 외면할까. 이 대통령이 흠모할 법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라마에서 울부짖는 라헬의 통곡’으로 지금껏 시인들의 영감을 자극한다.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라헬은 멀리 중동에만 있지 않다. 용산의 하늘 아래에도 지아비 잃은 여인들의 통곡이 9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곽병찬 편집인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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