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소설가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건 딱 한 번뿐이었다. 몇 년 전 설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데다 여러 가지 일이 겹치는 바람에 끝내 출발하지 못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야간자율학습 빼먹고 농땡이 치는 심정과 비슷했다. 거리는 한산했고, 사람은 드물었다. 여기저기를 빈둥거리다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극장에 갔다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 사람들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인가. 내가 명절 때마다 꼬박꼬박 교통대란에 시달리며 거북이처럼 고향으로 기어가는 순간에 이 사람들은 이렇게 웃고 즐기며 영화를 보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화가 났다. 그 후, 고향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극장의 사람들을 생각하곤 했다.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가도 정말 좋을까, 싶기도 했다.
서울은 천만개가 넘는 사람들의 조각으로 이뤄진 직소퍼즐이란 사실을 자주 잊는다. 모양도 색도 다른 수많은 조각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빈틈없이 꽉 맞물린 채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을 자주 잊는다. 시내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 서울 사람들이려니 생각하고 지낸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명절 때 서울에 남아 있어 보니 그걸 알겠더라. 서울서 태어나 자란 사람도 많겠지만 대부분 온 곳이 있는 사람들이다. 모두 다른 곳에서 출발해 여기 숨 쉴 틈 없는 서울에서 꽉 맞물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끔 마음이 짠해진다.
명절의 극장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어딘가 갈 필요가 없는 서울 사람들도 많겠지만 어딘가 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온 곳이 없어진 사람도 있고, 온 곳은 있지만 갈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온전히 혼자서 명절을 보내야 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명절 때마다 꼬박꼬박 동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은 혼자서 영화 같은 걸 보거나 텅 빈 거리를 걷고 있겠구나 생각하면 마음이 쓸쓸해진다. 나는 지방에서 올라가 서울에 정착한 ‘바깥사람’인데 명절 때 서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바깥사람’ 같다. 서울의 겉모습은 참으로 평등해 보이지만 안과 바깥의 구분이 이렇게 뚜렷한 곳도 없다.
매일 저녁 빠지기 직전의 배꼽을 붙잡고 열심히 보고 있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 서울의 진짜 모습이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는 바깥사람이 참 많이 등장한다. 강원도에서 아빠와 헤어진 후 서울의 부잣집에서 식모로 살아가고 있는 세경과 신애 자매, 예순의 나이에 혼자 살고 있는 학교 교감 자옥, 먼 이국땅에서 원어민 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줄리엔 강, 서울에 편입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인나와 광수 등 온통 바깥사람뿐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바깥사람들은 이번 명절에 무얼 할까. 동네의 골목을 서성이거나 열심히 집안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명절의 풍경도 달라질 때가 된 게 아닌가 싶다. 가족들끼리의 폐쇄적인 명절을 고집하는 대신 혼자 지낼 게 분명한 주변의 바깥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면 어떨까. 초대와 환대의 명절로 바꾸면 어떨까. 세경과 신애 자매, 줄리엔 강, 자옥씨를 집으로 초대하면 어떨까. 늘 하던 이야기 말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게 될 게 분명하다. 삼촌의 승진과 조카의 교육문제와 딸의 결혼문제 말고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처음엔 어색하겠지만 훨씬 즐거운 이야기가 많아질 것이다.
앞으로 30년쯤 지나면 우리에겐 돌아갈 고향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향이라는 단어의 뜻을, 그리고 가족이라는 단어의 뜻을 좀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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