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 에세이스트
문득 돌아보니, 우리는 최근 몇 년 계속 어떤 신기루에 홀리고 또 그것을 따라가고 있었다. 엠비(MB)가 ‘전과 14범’이니 비비케이(BBK)니 하는 온갖 의혹을 귓등으로 가볍게 넘기고 너끈히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다 이런 신기루 때문이었다. 대통령 씹기가 국민 스포츠라 불리던 노무현 정권 말년에, 국민의 힘으로 집권당을 만들어주었으니 어디 한번 해보시라, 다 혼내줘라! 하며 우리는 아무도 몰래 힘센 대통령을 갈망했었다. 하지만 그 힘센 대통령이 남의 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폼나고 근사한 것들은 신기루 밖으로 내밀어 보여주고, 흉한 것들은 그 안으로 슬그머니 숨겼다. 게다가 그 안개의 결마다 돈 빛깔이 도는 것도 같고, 돈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혹시 나한테도 이득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싶고 딱히 찍을 사람도 없으니까, 그야말로 사람들은 표를 집어‘던지듯’ 지난 대선 투표를 했고 그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당선되자마자 자기편을 확실히 보호하고 우리를 혼내기 시작했다. 신기루는 바야흐로 진압봉으로 육화한 것이다. 불법 집회라고 잡아가서 벌금 기백만원으로 묶어 놓으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미디어법입네 4대강입네 불법인지 뭔지 국민이 미처 알 틈 없이 저지르는 속도도 빨랐다.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사람은 살아 있을 때도 망령 취급을 받다가 기어이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고야 만다.
이렇게 이 신기루는 제 편에겐 너그럽고 남에게는 가차없었다. 지난 정부 인사청문회에서는 위장전입의 ‘위’ 자만 나와도 칼같이 낙마시키더니 이번에는 부처님처럼 너그럽다. 자식 공부 때문에, 아휴 참 다들 고생이지요, 하는 식으로 ‘그 정도야…’ 하며 서로서로 죄를 신속히 사해버리는 바람에, 국민은 끼어들 틈이 없다.
사실은 “끼어들지 말라”는 이 메시지야말로 진짜다. 갈수록 저들이 생각하는 ‘국민’과 ‘비국민’의 차이가 매우 명확해진다. 그 판별은 매우 쉽다. 거리에서 경찰이 지켜주는 사람이 국민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이다.
이런 비국민에게 보내는 현 정부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너희들 일단 살아 있게는 해 줄게, 근데 나랏일에 끼어들지 마라. 중요한 일은 너희 같은 ‘짝퉁’ 말고 우리 ‘진퉁’ 국민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아참, 그래도 세금은 꼭 내야 된다? 인구도 부족하니까 어떻게 키우든지 말든지 그건 니네 책임이지만 일단 애 좀 낳으렴? 곁방살이에 익숙해지다 보니 신기루에 투항하는 것이 자꾸 편해진다. 내 친구의 동창의 사촌언니가 결혼해서 지금 떵떵거리며 산다던데… 하는 식의 ‘카더라’ 통신은 언뜻 구체적인 실체처럼 감지되지만 사실은 신기루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그것 잡으려고 자꾸 초조하고 목말라서 여기저기 ‘아자 아자 파이팅!’ 하는 고함소리가 들리고,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는 혼잣말도 들리고, 나는 할 수 있다! 하는 외침이 울려퍼진다.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은 좋건만 안개가 너무 짙다.
오늘도 불 켜진 도서관의 창문 위에도, 일단 눈치 보며 야근중인 김 대리의 책상 위에도, 아르바이트 끝나고 지쳐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잠깐 잠이 드는 스물두살 아가씨의 어깨 위에도, 길에서 전단지 나눠주는 아줌마의 건조한 손등 위에도… 한국 사회 여기를 가나 저기를 가나 신기루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펄럭펄럭.
김현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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