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정 르포작가
고작 석 달 겪고 거기 사람들은 이렇더라 하는 건 무리다. 그래도 이야기하자면, 남미 사람들은 ‘그라시아스’(gracias,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작은 배려는 물론이고, 물건을 살 때도 돈을 내는 손님이 점원에게 먼저 “그라시아스”라고 한다. 당연하달 일에 고맙다는 사람들. 따져보면 나를 위해 애쓴 이에게 고마워하는 게 맞다. 내가 오늘을 사는 건 많은 이들이 어디선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눈에 안 보여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수 없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사람만이겠는가. 바람은, 햇빛은, 비는, 산은, 강물은, 꽃은, 동물은… 아니겠는가.
콜롬비아에서 버스를 탔는데 한 소년이 서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눈길이 불편하지 않았다. 저이가 대체 어디서 왔을까, 궁금한 얼굴이었다. “나 한국 사람이야” 하니, 궁금함이 풀린 듯 숨을 내쉬었다. 집에 가서 지도를 펼쳐 한국을 찾았을까. 소년을 보면서도 그랬고, 낯선 내게 먼저 말을 건네고, 집으로 들여 밥을 차리고, 심지어 잠자리까지 내주면서 ‘네 집이야’ 하며 자신들과 다른 나를 알고 싶어 하고,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 다르게 사는 사람들은 우물 안 개구리인 내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넓혀주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없다면 나는 한 뼘도 자라지 못할’ 거라고.
2주 전,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가 우즈베키스탄 모형 지폐를 가져왔다. 다문화교육 시간에 받았단다. 아이는 중앙아시아에 자리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세 나라를 알게 됐다. 집, 악기, 음식, 옷 등 전통문화와 관련해 사진과 모형, 인형을 직접 만지고 만화영화도 보았단다. 학교에서 영어 원어민 선생님과 영어만 만나던, 그래서 거기에만 머물던 아이가 우즈베키스탄 선생님을 통해 다른 나라들, 말을 만나 새로웠나 보다. “세계에서 잘 알려진 나라로 치면 미국·중국·일본인데, 우즈베키스탄처럼 알려지지 않은 나라를 알게 되니까 잘 모르는 다른 나라를 더 알고 싶어. 선생님이 우리나라 사람처럼 생기고, 우리말을 잘하셨어. 그 나라는 다민족 국가래.” 아이 세상이 넓어졌다.
며칠 전 받은 전자우편 두 통에 똑같은 이름이 있었다. ‘미누’.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서 불법체류자라 부르며 그이를 잡아가뒀다. 아는 사람들은 미누를 친구·식구·동지라 부른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붙은 이름은 노동자, 음악인, 이주노동자 문화활동가. 미누가 속한 밴드 ‘스톱 크랙다운’ 노래를 오래전에 들어봤다고 안다고 하긴 그러니 미누를 몰랐던 당신과 나는 마찬가지다. 그 이름을 이제 만나지만 미누가 한국에서 숨 쉬고 웃고 울고 일한 건 1992년부터다. 서로 모르나, 당신과 내가 이 땅에서 미누와 함께 지나온 시간이 짧지 않다. 당신은 당신대로, 미누는 미누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삶의 무게를 지고 그 시간을 지나왔다. 어떤 고통은 겹치고, 어떤 기쁨은 어긋나기도 했을 것이다.
미누는 어쩌면 당신과 내가 하게 됐을지도 모를, 혹은 해야 했을 일들을 했다. 식당과 공장(가스밸브·김치·봉제)에서 일하고, 이주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알리려 노래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방송을 했다. 인권을 위해,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다문화교육 강사였다니, 내 아이 선생님일 수도 있다. 곰곰 생각해 보면, 미누가 한 노동, 이주노동자 운동, 문화활동은 한국 사회를 좀 더 낫게 했다는 걸 알 거다. 그이를 직접 아는 이든, 나처럼 이제야 아는 이든 그동안 미누가 있어 조금씩 자라고 넓어졌으리라. 한국 사회가 미누에게 전할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고마워요’가 아닐까.
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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