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소설가
가을이다. 요즘의 구름과 빛과 공기를 만지고 있으면, 너무나 멀고 넓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우리가 우주 속에 살고 있는 게 확실하구나 싶다. 저기 보이는 하늘이 우주다. 시(詩)가 어울리는 하늘이다. 산문으로는 이 계절을 설명하기 힘들다. 하늘을 바라보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 인간이 만들어낸 국경선은 얼마나 부실하고, 견고하지 못한지요!/ 얼마나 많은 구름이 그 위로 아무런 제약 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막의 모래 알갱이들이 한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흩날리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산속의 조약돌들이 생기 있게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낯선 토양을 향해 굴러가고 있는지.” (<시편> 중에서) 하늘이 높아질수록 땅 위에 그어놓은 인간들의 선이 하찮게 보인다. 구역과 구역을 나누고, 선을 긋고 내쫓고, 땅 끝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은,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디스트릭트 9>는 인간의 구역에 대한 이야기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거대한 우주선이 나타났다. 우주선 안에는 병든 외계인들이 가득 타고 있다. 인간들은 집단수용소에 외계인을 격리수용하고 ‘디스트릭트 9’이라 불렀다. 인간들은 외계인을 혐오하고 집단수용소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달라고 항의한다. 감독의 의도는 분명한 것 같다. 외계인이라는 이름 대신에 흑인, 소수자, 이주노동자를 입력하면 된다. 외계인은 곤충처럼 생겼다. 흑인들은 까맣게 생겼다. 외계인은 지구의 말을 못한다. 이주노동자는 다른 나라의 말을 잘 못한다. 외계인은 소수다. 소수자도 소수다. 재미있는 건 외계인에 대한 흑인들의 반응이다. 흑인들은 흥분하면서 외친다. “저런 놈들 당장 다 쫓아내 버려야 한다고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이기에 저런 식의 ‘유머’가 가능한 거다. 인간은 자신보다 힘이 없는 자에게 절대 관대할 수 없는 걸까.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용산을 떠올렸다. ‘디스트릭트 9’를 ‘용산 재개발 구역’으로 바꾸고, ‘외계인’을 ‘용산 재개발 철거민’으로 바꾸어도 어색할 게 없다.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되듯 에스에프 영화가 인도양을 건너 리얼리즘 영화가 되었다. 영화 속 ‘MNU’라는 다국적 회사는 ‘디스트릭트 9’에서 외계인을 강제퇴거시키기로 한다. 책임자가 이렇게 지시한다. “놈들은 소유 개념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 땅이라고 얘기한 다음 여기에서 나가라고 하면 돼.” 누가 누구에게 나가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누구에게 받은 것일까. 선을 긋고 구역을 만드는 사람들은 늘 새로운 선을 긋고 새로운 구역을 만들어낸다. 영화 속에서 가장 웃겼던 장면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을 아프게 한다. 강제철거반이 서류를 내밀고 사인하라고 하자 화가 난 외계인이 손으로 서류를 친다. 땅에 떨어진 서류를 주우면서 강제철거반은 이렇게 말한다. “손으로 쳤으니까 사인한 거나 마찬가지야.” 순 억지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서류에다 사인한 적이 없는 사람들을 내쫓는 건 불법이다.
아직도 용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총리가 바뀌었어도 땅에 깊이 그어놓은 선은 지워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땅따먹기할 때 나뭇가지로 그었던 선은 발로 슥슥 문지르면 금방 지워졌다. 이건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걸까. 그렇게 힘든 걸까. 망루에 올라갔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도 땅 위의 선이 지긋지긋해서, 땅 위의 구역이 몸서리쳐지도록 싫어서 그 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구름이 그들의 망루 위로 아무런 제약 없이 유유히 흘러갔을까.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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