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애 사람팀장
“방송국 제작진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죠.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아들이 ‘장학퀴즈’에 출연 신청을 했으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 장고 끝에 대통령 아들의 출연이 결정됐죠. …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 몇 개는 미리 흘려달라는 거예요. … 제작진은 고심 끝에 정치적으로 라이벌 관계에 있던 3김과 박 대통령의 자녀들을 한자리에 모아 대결을 붙여보자고 했죠.”
지난봄 회고록을 낸 ‘아나운서’ 차인태씨가 들려준 ‘그때 그 시절’ 일화의 한 대목이다. 물론 ‘2세들의 퀴즈 대결’은 청와대 쪽의 거절로 무산됐다는데, 그때만 해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군도 또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감성을 갖고 있었던 듯싶다. 고교생답게 퀴즈 대회에 도전할 패기도 있었고, 인기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고픈 호기심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후 그의 운명은 갑자기 비극의 주인공으로 바뀌었다. 1974년 8·15 광복절에 어머니를 비운의 사고로 잃어야 했고, 그 5년 뒤 육사 3학년 때 아버지마저 심복의 저격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그를 키워준 절대적인 후광이 사라진 뒤, 그를 둘러싼 소문들은 늘 부정적이었다. 고교 입학제도와 대학 입시제도가 그의 진학 편의에 맞춰 바뀌었다는 설도 있었고, 70년대 후반 유명 대중연예인들이 무더기로 철퇴를 맞은 이른바 ‘대마초 사건’의 원인이 바로 ‘그’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는 대중들에게 방황하는 모습만 보였다. 특히 89년 이후 마약복용 혐의로 무려 여섯 차례나 구속과 석방을 반복했다. 2002년 44살에 환락가에서 히로뽕(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로 붙잡혔다 풀려났을 때 어느 독자가 꼬집었듯 “보통 사람이면 벌써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고도 남을 만한 이력”이다. 하지만 그는 ‘독재자의 아들’로 지탄받기보다는 ‘가장 예민한 시기에 부모를 잃은 불운한 황태자’로, 안타까운 동정의 시선을 받아왔다. 유신 치하에서 탄압받았던 중진 국회의원 8명이 그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성명서에서 표현했듯이, 그는 ‘역사의 피해자’로까지 여겨졌다.
그랬던 그가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아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결혼 직후인 2005년 초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 대해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서 일부 뜻을 관철했다. 그즈음 한 신문과 인터뷰에서 부친을 ‘어느 정도 독재자’였다고 인정하기도 했던 그는 오는 8일 공개될 예정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 이름을 싣지 말라’며 며칠 전 법원에 게재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또 한번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설사 법원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준다 하더라도 박정희의 친일 시비가 우리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지천명에 이르러 비로소 가장이자 한 기업의 대표로서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게 된 그의 초반 행보가 ‘독재자 아버지를 위한 변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실망스러우면서도 우려스럽다. 18년 철권통치로 목숨을 잃거나 패가망신한 억울한 역사의 피해자들이 수천 수만명에 이르고 그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은 후손들의 사연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드러나고 있다. 그 자신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지만, 그보다 훨씬 불행을 겪고도 동정은커녕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던 피해자들에게 먼저 사과를 해보일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이 너무 가식적이라면, 최소한 역사의 가해자 편에 나서는 ‘변신’만큼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쁜 유산의 청산은 못 하더라도 대물림은 더 이상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경애 사람팀장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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