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편집인
헌법이 대통령의 뜻을 준수하고, 대통령의 한마디가 법을 대체하던 시절, 노래는 예사로운 게 아니었다. ‘거짓말이야’ ‘고래사냥’ ‘그건 너’ ‘물 좀 주소’ 따위의 대중가요까지도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경찰은 애창곡까지 조사했다. 드라마 주제가 ‘예성강’을 좋아하던 김 형은 3학년 때 감방 갔고, ‘타박네’를 즐겨 부르던 이 형은 2학년 때 잘렸고, ‘오 자유’ 등 복음성가에 빠졌던 박 형 역시 1학년도 못 채우고 강제 징집을 당했다. ‘성냥공장 아가씨’를 애창하던 권 형은 제적된 뒤 인천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노래는 그치지 않았다. 억압이 심할수록 노랫소리는 높아졌다. 야만의 시대는 곧 노래의 시대였다. 울고 싶을 때 울게 하고, 소리치고 싶을 때 소리치게 하고, 막힌 가슴 잠시나마 틔우는 노래는. 일종의 산소호흡기였다. 복음성가 중엔 ‘미칠 것 같은 이 세상’이란 불경스런 제목의 노래도 있었다. 해가 뜨면 ‘아침이슬’, 달이 뜨면 ‘기러기’를, 사랑하는 이에겐 ‘사노라면’, 떠난 사람 그리우면 ‘부용산’을, 봄이면 ‘진달래’, 가을엔 “으악새 슬피우니~”를 불렀다.
권력이 대마초 사건을 잊을 만하면 터뜨린 것도 노래의 이런 치명적 중독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장희·송창식·신중현·윤형주·김세환·김추자 등 당대의 포크와 록 가수들이 일거에 싹쓸이당하기도 했다. 사람을 가둔다고 노래까지 감금할 수는 없었다. 권력은 유화책으로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따위를 조직해 솜사탕 같은 노래의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고, 대통령은 건전가요를 직접 작사해 온종일 방송하도록 하기도 했다.
‘광주’를 거치면서 노래는 1970년대 남미의 누에바 칸시온(새 노래)을 닮아갔다. 남미 민중에게 누에바 칸시온은 체포·감금·고문·학살에 맞서는 무기였다. 노래운동의 구호처럼 이들에게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었다. 그 힘은 절망과 좌절, 애상에 머물지 않고 자유와 평화의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노래한 데서 나왔다. 압제자에게 그 꿈과 희망은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총알이었다. 칠레의 피노체트 반란군은, 끝까지 노래를 멈추지 않던 빅토르 하라의 기타 치던 손과 노래하던 입을 짓이겨 버렸다.
다시 권력이 헌법과 법 위에 군림하고, 개가 주인을 무는, 시대의 반동이 깊어간다. 밥그릇 뺏기고 입에 재갈 물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이 폭증한다. 그와 함께 노래의 시대도 되살아나고 있다. 문성근·이재정·유시민·조기숙씨 등은 밴드를 결성해 ‘시민에게 권력을’(10월9일) 무대를 이끌었다. 정연주·신태섭·노종면·미네르바(박대성) 등 이 정권에 의해 잘리고 투옥됐던 이들도 ‘열려라 참깨’라는 표현의 자유 회복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대한민국을 참칭한 집단에 의해 고소당한 박원순, 시간강사 자리까지 빼앗긴 진중권 등은 가수 장윤주·장기하 등과 함께 ‘무한청춘엔진’(10월31일) 무대에 섰다. ‘신영복 교수에게 길을 묻’(23일)던 이야기 콘서트는 이제 전국 순회를 준비한다. 5년간 침묵했던 정태춘·박은옥은 콘서트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와 함께 돌아왔고, 백기완 선생은 자신의 노래로 풀어낸 이야기인생 한마당(10월26일)을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법이다’라는 표제어 아래 진행했다. 강산에·윤도현·이현철·조관우 등 가객들은 이들을 지원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31일 무대에서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굶어죽지 않는다. 쫀쫀하게 살지 마라.” 그의 메시지는 그의 씩씩한 노래(‘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로 말미암아 총알처럼 날아올랐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노래 1발 장전, 발사.
곽병찬 편집인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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