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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여기 없다 / 박수정

등록 2009-11-08 23:37

박수정 르포작가
박수정 르포작가
‘네팔 10046’은 이제 여기 없다. 미누를 만나러 경기도 화성 외국인보호소에 갔다. 창구 담당자는 면회신청서 위쪽에 검은 펜으로 네팔 10046이라 적고 수화기 저편에 말했다. “네팔 10046!” 이틀 뒤 네팔 10046을 처치한 법무부 출입국관리소는, 나라 이름과 숫자를 달리 붙일 수많은 네팔 10046을 붙잡으러 지금도 다니겠지. 미누가 보호소에 갇혔다 쫓겨나는 동안에도 누군가의 휴대전화에는 영어 문자가 계속 찍혔다. ‘단속’(crackdown)이라는 낱말에서 두려워 떠는 심장을 느꼈다면 비약일까. 추방과 제거 대상은 이들만인가. 지문 선명한 플라스틱 주민등록증을 가진 나는 ‘여기서’ 제거되지 않을까. 제거당하지 않아 행복할까.

‘사원번호 20048115’는 이제 여기 없다. 회사가 삭제한 지 일년, 공장에서 사라진 사람은 몇 백을 넘는다. 지난해 가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겉은 희망퇴직 속은 정리해고를 당했다. 노조를 만들고 거부하니, 강제휴업과 폐업, 임금체불이 이어졌다. 남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공장을 점거·파업했다. 그 안에선 더는 정규·비정규로 나뉘지 않았다. 비정규직 동료를 생각지 못한 지난 시간을 안타까워했다. 서로 따뜻이 인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본이 갈라 쪼개진 노동자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으리라 여겼다. 쌍용차 ‘77일’ 그 여름이 지났다. “생존권이 벼랑 끝에 내몰려 선택할 게 현장밖에” 없던 이들은, “인명 살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자비한 공권력” 앞에서 “참사와 희생”을 막으려 ‘8·6 노사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회사는 어겼다.

지난 10월30일 아침, 평택 쌍용차 공장 앞에 금속노조 쌍용차비정규직지회 노동자들이 모였다. “8·6 노사합의서 이행하라!” 다친 손에 핀을 박은 노동자가 외친다. “아무리 싸워도 다시 비정규직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이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공장 안팎에 있는 이들 모두 ‘관계인’에서 제외된 생산하는 사람들. 언제든 ‘여기서’ 제거되고 대체될 운명을 강요하는 현실에 맞선다.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는 이제 여기 없다. ‘이제’가 맞나. ‘벌써’가 아닌가. 오늘 이 현실을 바로 말한 이는 ‘용산’에서 숨진 양회성씨의 부인 김영덕씨다. 지난 토요일 밤,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마당, 민주노총 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다.

“300일이 되도록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없다. 반쪽짜리 재판을 했다. 경찰은 무죄, 철거민은 유죄.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동료를 죽였단 말인가? … 우리나라, 이 정부는 죽었다. 사법부도 죽었다. 국민이 뽑아줬으니 잘못된 건 국민이 고쳐야 한다. 없는 서민은 발붙일 곳이 없다. … 총리는 조합과 타협을 하란다. 조합이 사람을 죽였나? 공권력은 누가 투입했나? 열 달, 진상 규명을 외치며 싸웠다. 우리 남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먹고살려고 올라간 거다. … 이명박 정권, 3년밖에 안 남았다. 유가족들은 이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한번 싸워보자 했다. 우린 힘이 부족하다. 여러분이 함께 해주면 끝까지 싸우겠다.”

첫 말줄임표에는 김영덕씨가 본 죽은 이들 모습이 담겼다. 잘린 손목, 잘린 발목 …. 그대로 벽에 그리면 페루 아야쿠초 기억박물관의 벽화 일부가 된다. 테러리스트로 불리고 학살당한 이들. 부인들과 시민들이 싸워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이뤘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권력자들은 약하고 선량한 이들을 테러리스트라 몰아세운다. 참혹하고 비열하다. ‘여기’ 없는 이들과 ‘여기’ 없는 것들 속에서 ‘나’는 어디쯤 있는가. 길을 잃지 않아야겠다.

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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