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소설가
요즘 ‘헌재놀이’가 유행이다. 국회의 미디어법안 처리가 위법하다고 판정하면서도 무효화하지는 않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빗댄 놀이다. ‘했지만’과 ‘아니다’의 불합리한 호응이, 인과관계가 파괴되는 쾌감이 놀이를 재미있게 만든다. ‘커닝은 했지만 성적은 유효하다.’ ‘오프사이드는 맞지만 골은 유효하다.’ ‘술은 먹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재치 넘치는 표현이 많다. 어찌 보면 시적(詩的)이다. 기발한 문구를 보며 웃다가도 끝내 씁쓸하다. 그동안 우리는 파괴된 인과관계가 현실이 되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장면을 곧잘 봐왔다. 웃자고 시작한 놀이인데, 웃음은 잠깐이고 현실이 아프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풍자하면 통쾌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영 개운치가 못하다. ‘놀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놀면 놀수록 마음이 찜찜하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식의 농담과 놀이가 많아졌다. 인터넷 때문이지 싶다. 이 악물고 정색하며 상대방에게 대드는 대신 농담과 조롱과 풍자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방식이 늘었다. 인터넷의 짤막한 댓글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기술이 놀라울 정도다. 나 역시 농담과 웃음의 힘을 믿는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작품 <69> 속 작가의 말을 자주 인용하고 다녔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유일한 복수는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정색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걱정되는 건 시간이 갈수록 이런 ‘놀이’들이 시시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풍자를 하는 이유는 저 높은 곳의 누군가를 우리 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인데, 누군가의 권력을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농담을 하는 우리가 무기력해지고 시시해진다. 결국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든다. ‘헌재놀이’도 그렇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우리가 만들어낸 무수한 농담과 누군가에게 붙여준 별명들이 그렇다. 잠깐 웃었지만 비웃고 조롱할수록 우리들만 시시해지는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정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을 때 우리는 2009년을 어떻게 기억할까. 2009년을 떠올릴 때 어떤 단어가 생각날까. 나는 이 모든 상황을 기억하고 싶다. 우리를 괴롭혔던 사람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우리를 짜증나게 만들었던 사람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절차를 우습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고 싶다. ‘헌재놀이’ 같은 농담으로 2009년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맞아, 그때 헌재놀이가 진짜 재미있었지, 내가 달았던 댓글 인기 최고였는데, 기억 안 나?’라며 철 지난 유행어를 기억하듯 2009년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파괴된 인과관계의 불합리를 농담으로 덮어버리고 나면 결국 우리 손해다. 정작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놓치고 헌재놀이에 등장했던 명문장들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웃음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러면 더 큰 죄를 짓는 거다. 다음 세대에게, 다른 건 몰라도, 웃음은 전해주어야 한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 이렇게 열심히 웃고 있는지 모른다. 대신 왜 웃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웃음을 터뜨리기 전에 혹시 울어야 할 일은 아닌지, 비웃기 전에 혹시 정색해야 할 일은 아닌지, 누군가를 조롱하기 전에 내가 정확히 누구를 조롱하려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무기력해지지 않는다. 그래야 우리가 시시해지지 않는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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