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우리는 밥버러지예요 / 엄기호

등록 2009-11-22 21:19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수능을 하루 앞둔 지난 11일, 원주에서 한 재수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짧은 생을 마감했다. 명문대 진학을 준비중이던 이 학생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죄송합니다’는 짤막한 메모를 모의고사 시험지와 함께 남겼다고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자신의 부모에게 가장 죄송했을 것이다.

그럼 대학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미안하지 않게 될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강의실에서 물어보면 지금의 대학생들 태반이 부모에 대한 죄책감을 머리에 짊어지고 산다고 토로한다. 한 해에 부모로부터 ‘뜯어내야’ 하는 돈이 최소 천만원이 훌쩍 넘는다. 문제는 이 돈을 들인다고 하더라도 취직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란다. 중하위권 대학으로 내려갈수록 이 죄책감의 무게는 더 커진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밥버러지’, 부모 피 빨아 먹는 ‘드라큘라’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사정이 이러니 어찌 대학생들이 부모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가족에 대해 글쓰기를 해보라고 하면 상당수가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부모에 대한 미안한 마음뿐이다. 10년 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외환위기 전만 하더라도 학생들에게 가족에 대한 글짓기를 시키면 ‘숨 막힌다’, ‘짜증 난다’, ‘독립하고 싶다’는 말이 대세였다. 그러나 지금은 독립이 아니라 생존조차 불투명해진 시대이다.

정 그렇게 미안하면 한숨 쉬지 말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부모의 부담을 줄이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서울의 ‘아주’ 잘나가는 대학에 다니는 것이 아니면 과외 알바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하루 종일 다리가 퉁퉁 붓도록 일해도 시급 몇천원짜리 편의점이나 주유소 알바 같은 것들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장시간 노동 알바를 할 경우에는 공부할 시간이 절대 부족하다. 이것은 곧 학업 경쟁에서 낙오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다시 취업시장에서의 도태, 탈락으로 이어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모 쪽에서 오히려 지금 자신들을 뜯어먹더라도 자녀들에게 학업과 취직에만 올인하라고 권장하는 형편이다.

높은 등록금과 생활비에 더하여 서울의 경우에는 설상가상으로 주거비까지 급상승하고 있다. 서울시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그 잘난 뉴타운 재개발 때문이다. 흑석 뉴타운이 시작된 중앙대를 시작으로 학생들이 대학가에서 문자 그대로 내쫓기고 있다. 덕분에 하숙비며 원룸 전세값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다. 보증금을 빼더라도 한 달에 오십만원이 넘는다고 하니 어지간한 중산층이 아니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비용이다.

서구에는 학생 빈곤이라는 말이 있다. 학생으로 사는 것이 빈곤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빈곤층 출신의 학생들은 단기간에 돈을 벌 수 있는 성매매를 하지 않는 이상 생존과 학업을 둘 다 지킬 수 없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부모들이 빈곤의 짐을 대학생들 대신 짊어진다. 자식들 공부를 위해서 부모들이 가계 지출을 줄이고 또 줄이고 있다. 이걸 서구의 학생 빈곤에 빗대어 ‘부모 빈곤’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지금 대학가에서는 내년도 등록금 문제를 놓고 대학생들과 학교당국, 그리고 정부와의 연례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이걸 학생들만의 문제로 맡겨둘 것인가? 아니다. 이제 부모들이 나서야 한다. 내 한 몸 희생할 테니 너는 얌전히 공부나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곧 부모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임계치를 넘게 되면 밥버러지를 넘어 학업을 위해 몸 팔러 나가게 될지 모른다. 아니, 솔직히 말하겠다. 이것은 이미 시작된 일이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1.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사설] 윤석열·국힘의 헌재 흔들기 가당치 않다 2.

[사설] 윤석열·국힘의 헌재 흔들기 가당치 않다

나라야 어찌 되든, 윤석열의 헌재 ‘지연 전략’ [뉴스뷰리핑] 3.

나라야 어찌 되든, 윤석열의 헌재 ‘지연 전략’ [뉴스뷰리핑]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우게 된다 [아침햇발] 4.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우게 된다 [아침햇발]

트럼프의 MAGA, 곧 동아시아로 온다 [세계의 창] 5.

트럼프의 MAGA, 곧 동아시아로 온다 [세계의 창]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