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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유토피아 서사 / 오철우

등록 2009-11-25 18:41

오철우 기자
오철우 기자
영국 사상가인 프랜시스 베이컨의 소설 <새로운 아틀란티스>(1626)는 미지의 땅 벤살렘 섬에 세워진 이상사회를 그렸다. 과학(이성)과 종교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이상사회의 중심엔 살로몬 학술원이라는 과학의 전당이 자리잡고 있다. 과학은 유토피아 사회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물질적 풍요를 제공한다. 부족함이 없으며 인간 욕망은 충족된다. ‘이성을 갖춘 인간은 신처럼 자연을 지배할 만하다’라는 믿음이 배어 있다.

근대 이후에 다른 유토피아 소설들에서도 과학기술은 이상사회를 구성하는 주요소로 그려졌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에서 소인국·대인국을 거쳐 간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라퓨타에도 아카데미라는 과학의 전당이 중심이다.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1759), 베르주라크의 <다른 세상>(1648, 1653)에서도 풍요와 안락의 원천은 과학기술이다. 인공으로 설계된 공동체에서 인간 행동은 물론이고 심리마저 통제해 행복을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은 스키너의 <월든 투>(1948)에서 볼 수 있다. ‘없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서사엔 꿈, 기대와 뒤집힌 욕망 등이 묻어 있다.

요즘 행정도시 대체용으로 정부가 내세우는 화려한 비전을 듣다 보면 꿈을 마케팅하는 유토피아 서사가 떠오른다. 행정기능을 애써 뺀 탓에 서둘러 채워넣어야 할 꿈들은 과학도시, 과학메카, 첨단녹색지식, 창조산업 같은 말 속에서 춤을 춘다. 자족기능에서 열세일 게 뻔한 과학이 오히려 새도시의 대표 브랜드로 부각될 수 있는 것은, 과학이란 말이 오랫동안 유토피아 서사에 닿아 있었던 역사의 흔적으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꿈을 채워넣는다고 꿈이 쉽게 작동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유토피아 바깥의 현실에 있는 이들은 지금 과학이 정치인의 손에 휘둘리는 현실을 보고 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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