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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착한 집주인이 있어 더 무섭다 / 미류

등록 2009-11-29 21:38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못해요.” 한마디로 끝이었다고 한다. 살림살이를 바리바리 싸 용달차에 차곡차곡 쟁여넣은 뒤 한 시간 넘는 길을 달려 이사 갈 집 앞에 닿았을 때, 집이 오래되고 지저분해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해놓기로 약속했던 집주인은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우리가 나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 짐 다 싸서 나왔는데 어딜 가, 그냥 살아야지.” 친구의 말이었다. 계약을 하기로 약속한 한 시간 전 집주인이 갑자기 보증금을 천만원 더 받아야겠다는 전화를 걸어와 계약을 포기한 친구도 있다.

세입자는 몸뚱이를 집에 들여놓고 살아야 하지만 집주인은 등기부등본에 집 주소만 올려놓으면 된다. 이 불평등한 만남에서 생기는 서럽고 억울한 일은 주택임대차보호법을 비웃으며 넘쳐난다. 집주인이 집세를 터무니없이 올려달라거나, 심지어 그냥 나가달라거나 할 때, 세입자로서는 나갈 도리밖에 없다.

세입자가 집세를 내려달라거나 못 나가겠다고 말할 권리는 황당하게 들릴 뿐이다. 아직 집은 집‘주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동네에서는 철거할 때 군말 없이 나간다는 각서를 받기도 한다. 법적 효력을 떠나서, 삶이 오롯이 담기는 공간에서 나가랄 때 나간다는 약속을 받아두려는 발상이 문제다. ‘나’를 버리는 일이 그리 간단한가.

올해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한국의 사회권 실태를 점검했다. 지난 24일 공개한 최종견해에는 용산사건이 언급되었다. “강제퇴거는 오로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며 강제퇴거를 막기 위한 구체적 조처들을 ‘최우선적 사항’으로 촉구했다. 법무부는 용산사건이 강제퇴거가 아니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상가 세입자들이 추가적인 보상을 요구하며 농성한 것인데 강제퇴거의 전형적인 사례로 언급한 것은 왜곡이라는 주장이다.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가라고 하는 것이 강제퇴거다. 무지거나 무시일 정부의 주장은 무례하다. 삶과 뒤엉켜 있는 집을 함부로 허물어뜨리지 말라는 강제퇴거 금지 원칙은 사람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보상을 요구한다면 최대한 협의하고, 충분하고 충실한 협의를 거치고도 부득이하게 퇴거를 요청해야 한다면 90일 전에 알려야 하는 것이 인권지침이다. 세입자들을 ‘과도하게’ 보호하는 듯 느껴진다면 그건 오히려 세입자와 집주인이 ‘과도하게’ 불평등하다는 증거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하숙을 했다. 모처럼 큰맘 먹고 딸기를 샀는데 물이 안 나와 딸기를 씻을 수 없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문드러진 딸기에 곰팡이가 번지고 있었다. 순간 눈물이 났다. 처음 해보는 ‘남의 집’ 생활에 이래저래 지쳐 있던 때다. 주인집으로 내려가 미리 알려줬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서른 명 가까이 사는 집에 온수가 한 시간밖에 나오지 않는 것도 힘들다고, 석 달이 지나서야 겨우 얘기했다. 그랬더니 주인은 내가 여학생인 걸 탓했다. 불편하면 나가라고 해서, 나왔다. 눈물범벅이 되어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사 갈 방을 찾고 리어카와 아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집을 옮겼다. 나가라면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집주인들의 악함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집주인들이 악하지는 않다는 것, 그게 더 무섭다. 삶이 누군가의 자선에 내맡겨져 있는 것은 모욕이기 때문이다. 세입자의 권리를 법도 정부도 인정하지 않으니 착한 집주인들은 손해 보는 느낌으로, 못된 집주인들은 떳떳하게 세입자들을 만난다. 나가라면 나갈 수밖에 없는 50%의 사람들은 나가라는 말 한마디가 언제 나올까 마음 졸이며 집 때문에 서러워 몇 번을 더 울어야 할지 모르는 세상이 무섭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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