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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약자를 겨냥한 자의 딜레마 / 정세라

등록 2009-12-15 22:33

 정세라  경제부문 기자
정세라 경제부문 기자
‘상생’ 프랜차이즈. 홈플러스는 최근 기업형 슈퍼 가맹점 사업을 시작하면서 ‘상생’이란 단어를 썼다. 홈플러스는 선의를 믿어 달라 하는데, 중소상인들은 괘씸한 꼼수라고 비난한다.

사실 홈플러스 가맹점 모델은 얼핏 파격적이다. 1억9800만원을 투자해 슈퍼 가맹점을 열면 적자가 나도 매달 450여만원의 수익을 보장한단다. 솔깃한가? 실은 최저 수익 보장이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편의점 업계에서도 흔히 ‘최저생계비’란 이름으로 월수익 보장 제도가 통용된다. 최저 보장이 월 500만원 수준이라 예비 창업자들이 혹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가맹점주가 내야 할 광열비·인건비 등 매장 운영비가 포함돼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깝다. 운영비 수백만원을 떼고 나면 기초수급자 최저생계비와 다름없는 수십만원만 남는 경우도 허다해 최저생계비란 말이 딱 어울린다는 가시 돋친 평도 듣는다.

하지만 홈플러스는 이런 우려에 도리질을 했다. 일단 영업중 발생하는 인건비, 수도·광열비 등 대부분의 운영비는 가맹점주가 부담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런 비용을 모두 제한 뒤 적자가 나면 3년간 매달 450만원은 가맹점주 몫으로 보장하겠다고 했다. 물건도 홈플러스가 댈 것이고, 계약이 끝나면 투자금도 1억8000만원은 돌려주는 조건이다.

하지만 중소상인의 의구심은 들끓는다. 편의점 업계는 가맹점주한테 달랑 최저생계비만 남기는 곳이 수두룩한데도 큰 수익을 못 내고 있다.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는 “홈플러스와 비슷한 규모로 개인 슈퍼를 운영할 때 편의점 절반 수준인 15% 마진을 남기는데, 점주가 마진을 다 가져도 적자를 보기도 한다”며 사업 모델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홈플러스가 지금 치르는 것은 불신의 비용이다. 홈플러스는 3년새 슈퍼 수를 5배 이상인 168개로 급속히 불렸다. 이 과정에서 건물주에게 높은 보증금과 월세를 경쟁적으로 제시해 경영난을 겪던 개인 슈퍼를 파산으로 몰아가는 부도덕한 일들도 벌어졌다. 결국 중소상인 반발로 50여개 점포가 사업조정 대상이 되면서 발이 묶였다. 중소상인들은 상생 프랜차이즈를, ‘가맹 계약을 내세워 발 묶인 점포를 일단 개점하고 보자는 의도’로 풀이한다. 실제 홈플러스는 사업 일시정지 상태인 50여 점포를 가맹 계약 우선 대상으로 삼기로 했다. 또 직영점 출점도 계속할 생각이고 앞으로 가맹점 비중을 얼마나 배정할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굳이 상생 선의를 믿는다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대형마트 국내 성장은 한계에 이르렀다. 경쟁사 매출을 뺏거나 동네슈퍼 매출을 집어삼켜야 성장의 숨통이 트인다. 홈플러스한테 기업형 슈퍼는 불황기 대형마트 대량구매 대신 집 근처 소량구매를 원하는 소비자를 흡수하는데다 손쉬운 상대인 동네슈퍼를 잡아먹는 양날의 칼로 비쳤을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가족친화 경영은 안 자르고 월급 주는 것”이란 우스개가 도는 세상이다. 수백만 자영업자 가족은 인력 감축 위주의 구조조정을 기업 경쟁력으로 해석한 우리 경제가 만든 부산물이다. 수익점이 최저생계비 언저리를 맴돌아도 장사를 접으면 빈손 실업자나 파산자가 될 이들이 수두룩하다. 가맹점 수십개에 한정된 ‘소박한 상생’으로 구할 수 있는 이들보다 기업형 슈퍼가 초토화시킬 골목상권 피해자들이 훨씬 많다.

결국은 빈곤 문턱에 선 최약자를 과녁으로 삼았다는 게 홈플러스가 딜레마에 빠진 핵심 사유다. 기업이 자선단체일 필요는 없지만, 공동체의 기반을 지나치게 흔들면 존립 이유를 묻게 된다.

정세라 경제부문 기자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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