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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환원주의에 반대하며 / 이범

등록 2009-12-27 22:17

이범 교육평론가
이범 교육평론가
지금은 이산화탄소를 다량 내뿜는 지프형 차를 몰고다니는 형편이라 이런 얘기를 꺼내기 어색하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 4학년이던 1991년에는 두세명의 동료와 함께 환경운동 동아리를 만들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때 주류 운동권 친구들의 눈길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한마디로 ‘그런 짓 뭐하러 하느냐’는 것이었다. 때마침 동독도 망하고 소련도 무너지고 해서 좀 새로운 문제의식에 눈뜰 만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웬걸, 어렵사리 이런저런 강연회와 행사도 열고 토론도 해보았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80년대 좌파 이론가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에게 “독점이 강화되면 종속이 심화된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아니지 않으냐?”고 질문했다가 “마르크스주의는 실증자료에 의해 반박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황당한 답변을 들어야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강조하던 이론가였는데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이 세상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단일한 이론’이라고 믿게 되면 세계는 깔끔하고 명쾌해 보인다. 그리고 그 이론으로 포착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현상은 실제 삶에서도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하지만 물리학은 파동이론과 입자이론 양쪽 모두 맞을 수 있음을 보여주며, 생물학은 진화 현상이 유전자 염기서열의 변화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환경문제를 자본주의적 과잉소비로, 남북 분단을 미 제국주의의 문제로, 교육문제를 학벌주의로, 진보정치를 노동운동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틀린 것일 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근본적 민주주의의 실마리를 외면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것이 바로 환원주의의 결정적인 해악이다.

내가 파악한 바는 이러하다. 학문의 영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일종의 ‘연구지침’(heuristics)으로서는 유효하지만, 실증적 검증을 견뎌야 하는 과학 ‘이론’으로서는 생명력을 잃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는 과학으로서의 측면만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는 일종의 ‘비판철학’으로서, 자본주의가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분열시키고 이런 분열에 상응하는 정치와 경제의 구별(그리고 그 주요한 결과로서 폴라니가 지적한 ‘자기조절적 시장’이라는 식의 환상)을 일으킴을 폭로한다. 요컨대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직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소유권’이라는 또다른 권리에 의해 억눌리는 것이 자본주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자치권이나 참정권을 공식적인 ‘정치’의 영역에 한정하지 않고 경제나 여타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근본적 민주주의 운동의 이념으로서,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사라질 수 없는 지속력을 가진다.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에 대한 총체적 이해(특히 이 시대에는 전지구적 수준의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세상을 수미일관하고 ‘단일한’ 이론으로 환원시켜 이해할 가능성은 난망하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놓인 여러 이론을 짜깁기하는 수준이다. 우파가 짜깁기에 동원하는 실과 바늘이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전제와 적자생존의 원리라면, 좌파의 실과 바늘은 보편적 권리에 대한 관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요새 부쩍 거론되는 생활진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진즉 좌파의 영역일 수 있었던 것들이다. 문제는 너무 오랫동안 여기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백안시해온 ‘공인’ 좌파가, 환원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범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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